그라프의 STORMBR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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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46)

4일째 되는 날, 역시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방 안을 빙빙 도는-비유가 아니다!-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일은 벌어졌다.

“어? 알츠 레미안이 없어요.”
방문을 열었을 때, 익숙하게 전화기 앞을 지키며 책을 읽고 있어야 할 레미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전화대기도 안하고........”
두리번거리면서 그녀를 찾다 보니, 전화기 앞에 못 보던 메모지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급하게 휘갈겨 쓴 티가 역력했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Ib 거수자 출현 연락. 사단 후방 경계선 7-2초소. 현 시각 1252시. 나 먼저 나간.......다......?!”
고개를 번쩍 드니 앤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1252시, 불과 5분 전이에요, 소대장님!”
“앤!”
그녀가 급하게 뛰쳐나갔다. 전화기 앞에 누군가가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하고 잠깐 고민했지만, 이 방안에서는 지켜야 할 것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는 것을 상기한 나는 급히 앤의 뒤를 따랐다.

앤과 함께 거수자 출현 지점을 둘러본 날 저녁, 우리는 지도에 펠트키르히 마을과 각 출현 지점을 연결한 선을 그어 두었었다. 목표가 마을로 다시 돌아간다고 할 경우 반드시 지나갈 것이라 예상되는 지점에서 숨어 있다가 뒤를 밟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눈 덮인 벌판에서 어떻게 들키지 않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레미안은 전술마법사이며 인식장애 마법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후우. 춥다.”
몇 분간 뛰어다니느라 올랐던 열이 식으면서, 새삼스럽게 추위가 느껴졌다. 애당초 내 옷은 두껍지도 않고 말이지.

철도 강도에게 기관사가 죽은 폭주 기관차처럼 무작정 달려 나가는 앤을 간신히 따라잡는 데에 성공한 나는, 빨리 레미안에게 합류해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정확하게는, 앤에게 우리는 전술 마법사가 아니며 인식장애를 쓸 수 없고, 따라서 하얀 눈밭에서 거동수상자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으며, 그러므로 매복 후 추격이란 힘든 과업은 레미안에게 맡겨두고 일단 마을에서 합류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점을 설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앤과 나는 각각 7-3 초소 방향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가장 가까운 길목 두 군데를 골라서 지켜보기로 하고 갈라졌다. 그게 약 10분 전의 이야기. 그럼 아닌 쪽의 사람과 어떻게 연락할 것이냐는 점에서 허점투성이라고 우릴 비난할진 모르겠지만, 무전기도 없고 전령으로 쓸 사람도 없다. 미리 계획을 짜서 시간대로 움직이는 방법을 감수할 수밖에.

“......저 사람인가?”
그렇게 마을 바깥쪽에 있는 한 헛간 근처에 자리를 잡고 한 20~25분 정도가 경과하고 나니, 과연 사단 후방 경계선이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성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속도로 마을 쪽으로 오는 것으로 보아 꽤나 체력이 좋은 사람 같았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상대의 모습은 선명해졌지만, 얼굴도 목도리와 색안경으로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그림자에 숨어서 상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간격을 두고 따라붙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오더니, 내 입을 가로막았다.
“으......헙!!”
설마, 혼자가 아니었나?!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려고 했지만, 이윽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이!”
........레미안이었다. 언제 다가온 거지?;;
“인식장애마법이야. 너도 눈치 못 채는 게 당연하지. 뭐, 지금 걸로 깨졌지만.”
그런 마법이 있다는 건 물론 알고 있었지만....... 이런 효과였구나 싶었다. 분명히 목표물 뒤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하나 불쑥 튀어나온 것 같았다. 레미안이 걸어온 자리에는 눈이 덮여 있어서 그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그것조차 그녀가 날 건드린 뒤에서야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용히 따라와.”
레미안은 잠깐 날 째려보고는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 너하고 나를 범위로 지정하고 인식장애마법을 걸 테니까, 첫째, 나한테서 거리 3미터 이상 떨어지지 말 것, 둘째, 행인들하고 안 부딪히도록 조심해. 잘 되면 저 녀석 숙소까지 따라 들어가도 모를 거야. 앤 하사는 어디 갔어?”
“다른 쪽 입구에. 40분 기다려서 안 오면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었어.”
그 말을 들은 레미안은 혀를 차더니 날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하아. 별 수 없나, 이런 녀석이라도. 혼자선 안 되니.......”
........저기, 지금 나 무시당한 것 맞지?(...)
“가만히 서있어 봐.”
그녀는 내 어깨를 붙잡아 똑바로 세운 다음, 내 눈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몸 주변을 아주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가루 같은 것들이 둘러싸더니 곧 보이지 않게 사라졌다. 그 시점에서 궁금한 점이 생긴 나는 레미안에게 물었다.
“저기, 이건 정말로 눈에 안 보이게 되는 거야?”
“그렇게 편리할 턱이 없잖아. 불가시 마법을 지상에서 개인 단위로 쓰는 건 힘들어.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건 공군의 비행선단 뿐이고. 그러니까 이건........ 그냥 우리를 봐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야. 광학 쪽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작용한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네. 우릴 몰라본다고 해서 정말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지나치게 접근하진 마. 그러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거니까. 마법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알았어?”
별로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레미안은 의외로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아무래도 자신의 전문분야라서 그런 걸까?
“가자.”

그렇게 우리는 일단 다른 쪽에 가 있는 앤은 일단 내버려두고, 둘이서 상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거동수상자는 이미 사단 Ib의 명령을 받고 나온 부사관에게 미행당한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알게 모르게 등 뒤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법의 정확한 효용범위를 몰라, 레미안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상대를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으앗......”
한참 걷던 와중, 레미안이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멈춰서는 통에 그녀와 부딪힐 뻔 했다. 뒤돌아선 레미안은 자신의 긴 외투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날 쏘아보았다.
“좀 떨어져서 걸어! 3미터라고 말했잖아?!”
“미,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냐.”
.......국경마을의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길은 며칠 전에 내린 눈, 혹은 눈이 살짝 녹은 물과 흙이 뒤엉켜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런 노면 위에서 빠른 걸음으로 누군가의 뒤를 바싹 쫓으면 흙탕물이 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레미안의 검은 외투에는 그렇게 튄 노란 물방울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미안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레미안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왜 그렇게 늦어?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미안. 중간 중간에 사람이 끼어들어서 안 부딪치려고 하다가 보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 걷기만 하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렵냐고 하면 나도 할 말이 없지만, 그게 이상하게 안 되는 걸 어쩌라고.(...) 게다가 드문드문 지나가는 행인들이 레미안과 나 사이에 끼어들고, 레미안도 걸음의 속도가 수시로 달라졌다. 거기다가 또 다시 흙을 튀겨서 그녀의 짜증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던 탓에, 내 시선은 자연히 발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정작 거동 수상자가 뭘 하고 있는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후우........ 자.”
“.......응?”
“잡으라고. 이러면 안 떨어질 것 아냐?”
그런 내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미안은, 한숨을 쉬고는 손을 내밀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는 이미 저 앞에 가는 거동 수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두 손이 닿자마자, 레미안은 거리낌 없이 내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는 걷기 시작했다.
“레, 레미안?”
“조용히 해.”
다급히 그녀를 불러봤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표정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기분에 얼굴이 붉어졌다. 레미안의 손은, 아인의 거칠어진 그것과는 다르게 정말로, 흔히 말하는 여자아이의 손 같이 매우 부드러운 감촉이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주로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전술마법사라서 그런 것일지도? 야전에 나온 기간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은 걸로 아니까 말이지.
어쨌든, 나를 군인답지 못하다고 수시로 잔소리를 하는 레미안의 손을, 엄마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잡고 걷는 것은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가 내 속의 뭔가를 살짝 건드리는 듯한, 그런 기분.

아무튼, 누군가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인지 특별히 들르는 곳도 없으면서 괜히 마을을 몇 바퀴 돌며 사이길이나 골목길을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간 거동 수상자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레미안도 나도,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거동 수상자가 이제는 안심했다는 듯 발을 툭툭 털고 들어선 건물은 다름 아닌....... ‘호텔 아틀리에’였다!
“.......맙소사.”
“우리랑 같은 숙소였다는 거야? .......기가 막혀서!”
그리고 화를 내는 레미안. 그동안의 그녀의 언동을 봤을 때, 아마도 코앞에 있는 상대를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분한 모양이었다.
“그렇더라도 한 지붕 안에 있었다는 건 예상 밖인데. 식당에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었고......”
마을에서 제일 좋은 시설이라고는 해도 도시에 있는 커다란 호텔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건 상대가 그만큼 조심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우연이 겹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이건 소대 평판 문제야. 아니, 정확히는 내 평판 문제야. 바로 옆에 있는 걸 두 번씩이나 눈치 못 채다니.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뭐라고 할지........”
물론 레미안은 그걸 납득할 수 없는 것 같았지만. 하긴 누가 보고 받더라도 바로 같은 건물 아래에 거동 수상자가 있는 것을 3일간 몰랐다고 하면, 뭔가 웃기고 한심해 보이긴 하겠다. 그런데 ‘두 번’이라면 첫 번째는 뭐지? 잠깐 동안 의문을 가졌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내 이야기로군. 기차 바로 옆자리에서 보름을 같이 있었지만 그녀는 내가 남자인 걸 몰랐었으니까. 그게 그렇게 분했던 걸까?
“아무튼 쫓아가자.”
“쫓아가서 어떻게 하려고?”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만류했다. 체포할 것도 아니면서, 쫓아가서 어쩌자는 거냐. 하지만 그녀는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인식장애마법은 장식이 아냐!”
......아까는 마법에 너무 의존하면 안 된다고 해놓고선. 하긴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어느 정도가 의존이고 어느 정도가 활용인지 논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긴 하다.
급히 호텔로 따라 들어가자, 막 우리가 투숙한 방과 반대쪽으로 통하는 복도로 사라지는 거동 수상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프론트 직원과 눈이 마주쳤지만, 아직 마법의 효과가 유효한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레미안은 거동 수상자가 향한 쪽으로 가면서 내게 말했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앤이 방으로 돌아갔을 거야. 저쪽 복도로 보내줘.”
“레미안은?”
“난 저 녀석 방에 살짝 따라 들어가서 인상착의만 확인할 거니까.”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그쪽으로 가버린 다음이었다. 뭐....... 맨손으로 마법사인 그녀가 질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잠깐은 괜찮겠지. 거기다가 어설픈 내가 따라붙는 것보다는 앤을 보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급히 방으로 돌아갔다.

“에, 소대장님? 알츠 레미안은요?”
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화기가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앤이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먼저 돌아와 있었구나.
“앤, 거동 수상자의 거처를 알아냈어.”
“어딘데요?”
“여기, 이 호텔.”
“네?! 그, 그럼 알츠 레미안은........”
“녀석의 방에 따라 들어가서 정보를 캘 생각인 모양이야. 빨리 가서 앤, 너를 불러달라고 하기에 온 거야.”
그녀는 급히 자신의 외투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권총은 언제 챙겨온 거냐, 앤.(...) 개인 권총인지, 리볼버를 챙겨 자신의 바지에 찔러 넣은 그녀는 방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다 말고 서서 물었다.

“위치는요?”
“아, 프론트 너머 복도로 들어갔.......”
-콰앙-!!!
“꺅!!”
“우악?!”
-우당탕-!!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면서 앤이 내 쪽으로 붕하고 ‘날아’왔다. 시야를 앤의 붉은 머리칼이 가득 채우나 싶더니, 곧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앤의 등을 밀어내면서 몸을 일으키는 동안 든 생각은 그거였다.
“앤, 앤? 괜찮아?”
“으윽.......”
앤은 다행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뭔가에 충격을 받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혹시 총상이라도 입은 건 아닐까 싶어 살펴봤지만, 피가 흐르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듯 했다. 방문 쪽을 바라보니, 뭔가에 의해 손상이 가 있었다. 총이 아니면.......
“뭐야,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큰 소리에 놀란 몇몇 투숙객들이 복도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퍼퍼퍽-!!
“제길, 거기서!!”
레미안인가? 그녀가 쫓고 있는 존재라면....... 거동 수상자!
“젠장, 레미안이 들켰나?!”
급히 몸을 일으켰다. 레미안이 들켜서 싸우고 있는 통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면, 앤은 잠시 내버려두고 레미안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모르고 놀라서 복도로 나와 있는 사람들도 급히 방 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 앞으로 갔는데.......

-콰앙-!!!
“우악?!”
-퍼억-!! 우당탕-!!

문 밖으로 한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또 다시 큰 소리가 들리면서 내 눈앞으로 뭔가가 날아들었다. 시야를 신발 밑창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가득 채운다 싶더니, 곧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진짜 싫다.(...)

머리에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신발 밑창으로 추정되는 것에 맞은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귀가 핑핑 울리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혼미한 시선 사이로, 누군가 방 안으로 급히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방 안을 두어 번 두리번거리던 그 ‘누군가’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면서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다가, 등 뒤로 빛줄기 같은 것이 몇 개 스쳐지나가자 몸을 숙이면서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얼핏, ‘괜찮아?’ 같은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머리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제대로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를 풀어줘라!!”
흐릿하게 들려오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는 레미안이었다. 그녀는 손에서 파지직거리는 뭔가를 내뿜으면서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미안......?”
“괜찮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앤, 앤? 맙소사, 앤한테 맞았다니.......”
정신이 들면서 슬슬 상황 파악이 되었다.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운 사람은 거동 수상자였다. 그리고 내 목에는 ......써늘한 금속재질의 뭔가가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으.......”
레미안은 날 붙잡고 있는 사람을 노려보면서 한 발자국씩 다가왔지만,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앤을 힐끗 내려다보니, 그녀는 아직도 신음소리를 내면서 쓰러져 있었다. 날 붙잡은 거동 수상자와 레미안의 대치로 인해 방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
“........”
레미안도, 그리고 날 붙잡은 누군가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나 역시 내 목에 칼이 들어온 상태에서 뭔가 말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손님! 아무리 거칠게 즐긴다고 하셔도 기물을 파손하시면 곤란합........니다? 어랍쇼?”
“........위험해!!”
한동안 계속되던 침묵을 깬 것은, 복도에서 구경나온 사람들을 헤치고 종업원이 등장하면서였다.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레미안의 신경이 분산된 틈을 타서, 날 붙잡고 있던 사람은 손에 쥔 칼을 레미안 쪽으로 던졌다. 던지는 폼은 어색했지만, 그 서슬에 놀란 레미안은 그걸 피하느라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자 ‘그녀’는 날 레미안 쪽으로 밀쳐내곤 그대로 창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칼......!!”
“어어.......?”
방금 뭔가 들은 것 같았는데?
-쨍그랑-!!
“비켜!!”
레미안은 급히 날 제치고선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젠장, 놓쳤어!!”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하면, 레미안은 인식장애 마법을 믿고 상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동 수상자는 외투를 벗는 대신 가방을 등에 메더니, 그대로 방을 나서려고 했으며, 하필 동선이 레미안과 겹치는 통에 두 사람은 부딪히고 말았다. 레미안은 방을 잘못 들어온 거라고 둘러댈 속셈이었지만, 처음에 어리둥절해하던 상대는-아무도 없는 데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으니- 레미안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대로 방 안에 있던 꽃병과 재떨이 같은 것들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방 바깥으로 급히 달려 나갔는데.......도망치며 향한 방향은 우리 일행이 투숙하고 있던 스위트룸 쪽이었다. 상대를 추격하던 레미안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상대의 등 뒤에 마법 공격을 가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바람에 그게 스위트룸의 문을 부수며 앤에게 맞아 버렸다. 그 다음은 다들 아는 대로.

“.......기물 파손 비용도 공금 처리 해줄까?”
“.......일단 내 보는 게 낫겠죠?”
완전히 비어버린 지갑 때문에 침울해진 내게, 앤은 그렇게 말했지만....... 레미안은 부정적이었다.
“......안 될 거야, 아마. 호텔 숙박료 외에는 받을 수 없겠지.”
“에, 그래도.......”
“앤 하사, 그럼 뭣 때문에 돈을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대대장님이 알아보려 할 거고, 그러면 현역 군인들이 호텔에 투숙하면서 기물을 파손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에요.”
“우우.......”
앤도 나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급히 호텔 아틀리에를 떠나 부대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자칫 경찰이 와서 사태가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레미안은 급히 마법을 써서 복도에 구경 나온 투숙객 몇 명과 호텔 종업원의 기억을 살짝 고쳤고, 그 내용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민망한 것이었다.
그 내용이란 대강 이렇다. 애인 사이로 한적한 동네에 여행을 온 나와 레미안과 앤은 대낮부터 뭔가 동하는 통에 3P(...)를 ‘매우’, ‘거칠게’ 벌였고, 그 때문에 호텔 기물이 파손된 것이며-무슨 짓을 하면 그런 짓을 하는 와중에 호텔 방문에 구멍이 뚫리는 걸까하는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묻지 마라. 나도 모른다....... 창문이 깨지는 것까지는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지만-, 거동 수상자는 말 그대로 무전투숙객이었다는 설정이 덧붙여졌다.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문제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복 차림의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나와서는, 적국의 첩보원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그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그럴 생각은 없었긴 했지만 살상 가능한 마법을 날리면서 싸웠으며,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을 파손했다. 게다가 그것이 원래 임무에서도 벗어난 행위라는 것은 ‘마찰’이라고 해석할 수 있더라도 그걸 정리하기 위해 한 짓은 사소한 범위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무려 ‘기억조작’. 만에 하나 걸렸다가는 시말서 같은 걸로 끝날 일이 아니다.(먼산)
결국 우리 세 사람은 이 건을 셋 만의 비밀로 하기로 합의하고, 전화로 Ib와 대대장에게 일의 경과를-절반의 진실만- 알린 뒤에 돌아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녀석이 호텔에 다시 돌아올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레미안이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짐 싸서 나가려고 하던 중이었다고 하니 그럴 일이야 없겠지.
“앞으로 저 호텔에 갈 일은 없겠네.”
내가 지나가듯 내뱉자, 앤과 레미안이 얼굴을 붉혔다. 댄다고 댄 핑계가 하필이면 ‘매우 거칠게 진행된’ 3P였으니까, 그 쾌활한 종업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쿨럭)
“아아....... 짜증나.”
레미안이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을 하자, 앤도 나도 똑같이 한숨을 쉬었다. 임무는 실패, 호텔 아틀리에에서는 변태(...)들로 찍혔고, 나와 앤은 각각 강렬한 킥과 마법에 한 차례 두들겨 맞았고, 일처리를 위해 민간인들에게 마법을 쓴데다가, 호텔 숙박료는 몰라도 수리비는 위에다 청구할 수 없는지라 지갑마저 텅텅 비어버렸다. 한숨이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것 아닌가.

어쨌든, 우리 소대가 받은 첫 임무는-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세 사람만의 말 못할 비밀만을 남긴 채로 끝났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뭔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가우가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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