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프의 STORMBR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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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51)

“으으.......”
“바보, 천치!! 빨리 못 일어나?!”
바람은 내 등 쪽으로부터 불어왔고, 총은 레미안 쪽으로 쓰러졌다. 계속해서 내리는 눈 때문에 잔뜩 무거워져 있던 첼트반이 그대로 내 등을 밀어붙이는 통에 나는 레미안의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몸 앞 쪽으로 부드러운 충격- 뭔가 물컹하는 느낌이 났지만, 레미안이 내 얼굴을 때려대기 시작하는 통에 그런 것을 느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서 일어나! 이대론 눈 속에 파묻힌다고!”
-퍽-! 퍼퍽-!!
“아, 알았으니까 때리지 마!!”
레미안이 자신을 깔아뭉갠 날 밀치면서 일어서라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등 뒤에서 뭔가가 짓누르는 통에 몸을 일으키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바람막이 삼아 파뒀던 눈이 그대로 내 등 위로 무너진 모양이었다. 그것만이라면 모르겠는데, 눈 녹은 물을 살짝 머금은 첼트반이 손발을 얽어매서 움직임을 방해했다.
바람에 날려가지 말라고 깔아둔 돌들이 문제였다. 애초에 돌이 아니었으면 이 바람 속에서 천막을 세울 수도 없었겠지만, 천막이 복잡한 형태로 무너지고 나자 그 돌들은 그대로 족쇄가 되었다. 몸이 지쳐 있다는 점도 더해져서, 도무지 첼트반을 걷어내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빨리 못 비켜? 어떻게 좀 해보란 말이야!”
날 보고 난리친다고 당장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고 있어, 하고 있다니까! 가만히 좀 있어!”
일단 몸의 중심을 좀 잡아서 상반신이라도 일으켜야.......
-물컹-
“.......물컹?”(...)
낯익은 감촉이다. 아마도 두 번째.
“꺅, 어딜 건드리는 거야?!”
“아니, 그건 불가항력으로......!!”
“믿을 수 없어! 이런 상황에! 전에 쿤츠도르프의 목욕탕에서 그랬던 것도 고의가 아니었던 거지, 사실은?!”
한 달도 더 지난 일을 왜 또 꺼내는 거냐. 그러니까 이건.......
“오해입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눈 밑에 깔려, 겨울옷을 입은 채로, 두 사람이 겹쳐져서 꿈지럭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힘든 일이었고, 날 밀어내려고 애쓰던 레미안이나 일어나서 떨어지려고 애쓰던 나나 몇 분 정도가 흐르고 나선 움직임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우, 후우.......”
“하아, 하아.......”
땅바닥과 첼트반 사이의 좁은, 빛도 없는 공간에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멍청한 작전에 대한 불만, 그런 작전을 짠 대대장이나 사단 참모부 욕,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소대원들 걱정까지도,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숨쉬기조차 힘든 지금 상황이 여러 가지 의미로........ 압박감 있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압박감이냐고? 공중전화 박스 안에 두 사람이 함께 딱 붙어 있는 것 같은 압박감이다!
힘이 빠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감각만은 아까부터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몸이 땀에 젖어 있기 때문에 사소한 것조차 더 잘 느껴지는 건지도. 두꺼운 옷자락 너머로, 내 몸무게, 첼트반, 그리고 그 너머의 눈덩이가 쌓인 무거운 중량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레미안의 몸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겹쳐져 있는 가슴이 달싹일 때마다 다른 곳과 미묘하게 다른,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감촉이 내 몸을 밀어 올리려고 애쓰며 부질없는 노력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쪼그라들기를 반복. 그리고 그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와 닿는다. 이만큼 가까이 있으니 레미안의 몸의 가장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우.......으음.......”
몸 앞부분은 땀 때문에 질척거렸고, 몸 뒷부분은 차가운 눈에 짓눌려 소름이 돋았다. 축축하다. 축축하다. 기분 나쁜 감촉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기분 나쁜 감촉에 뭔가가 달아오른다.
“하아.......하아..............리히트.”
“우앗!!”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 보고 싶었는지, 레미안이 손가락 끝에 희미한 빛을 띄웠다. 밝기 조절이 가능한 마법이니 만큼 강도를 최소한으로 낮춘 것 같았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던 나는 찡그리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서 얼마간 시간이 지나, 우리 두 사람의 시력이 돌아오자....... 레미안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 특유의 또렷한 눈동자가 경악을 담고 있는 것만이 보일 뿐. 나? 내 얼굴이 보일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본 바로는 꽤나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레미안이 박치기를 할 턱이 없지.
-퍽-!! 퍼억-!!
“얼굴, 치워! 콧김, 내뿜지, 말고! 갑갑해!!”
“아야야!! 그만해!! 그만하라니까! 나도 비킬 공간이, 아야!!”
“시끄러! 어떻게든 해 보라고, 이 바보!!”
“아프다니까! 그만! 그만!”
박치기에 얼굴까지 꼬집어 대니, 나도 점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 힘이 없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겠는데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결국 어찌어찌 손을 움직여서 그녀의 손을 못 움직이게 하고, 고개를 앞으로 숙여 박치기를 못하게 ‘내리눌렀다.’ 그리고 그 서슬에 그녀의 정신이 흐트러졌는지, 희미한 불빛은 다시 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아인이야 원체 기력이 좋아서 나를 못 움직이게 찍어 눌러 놓고 자기 할 일을 했었던 전력이 있다는 것은 말 안해도 알 것이다. 마리아 역시 내 방에서 날 순식간에 쓰러뜨려버린 적이 있다. 최근에 나와 접촉이 있었던 여자아이들 중에서 나보다 힘이 약했던 것은 오렌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숫자가 한 명 늘었다.

“......”
“......”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서긴 했지만, 다시금 서로의 콧김이 닿는 거리까지 얼굴을 마주함으로서 분위기는 묘해졌다. 한창 난리를 치던 레미안은 몇 번인가 손을 빼내려고 애를 썼지만 곧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진정됐어?”
그녀가 팔딱거림을 멈추고 나서 조심스럽게 묻자, 레미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다행이로군.
“......나도 움직이고 싶지만 지금은 힘들어. 그러니까....... 불쾌해도 조금만 참아줘.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보자.”
한심하게 여기는 남자 녀석 밑에, 밀폐되다시피 한 공간에서 묘한 자세로 깔려 있다면 내가 여자애라도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을 거다. 두들겨 맞으면서 많이 화가 났긴 했지만, 애써 억누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바보, ........진 않아. 답답한 게 질색일 뿐이지.”
“응?”
“아, 아냐!!”
뭔가 말하려고 한 것 같은데...... 너무 웅얼거려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무튼, 눈이 더 많이 쌓이면 좋은 꼴 보긴 힘들 거야. 아직은 움직일 수도 있고 공기도 어찌어찌 들어오는 것 같지만. 봄이 올 때쯤 동태가 되어선 발견되겠지.”
첼트반 안에서 이렇게 죽는다라.......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혼자였다면 분명 무서워서 견디지 못했겠지만, 눈앞에는 아직 이야기를 나눌 레미안이 함께 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죽는다면 분명히.......
“그렇게 되면 안 돼. 그럼 아인이 들키.......”
“하! 넌 이렇게 된 마당에도 누나 걱정이니? 그것 참 대단한데.”
레미안의 비아냥거림에 마음이 상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은 아인 걱정할 때가 아니다. 눈사람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니까.
“......일단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서 돌들을 밀어내 보자.”
“.....그, 그래.”

그래서 우리는 거치적거리는 첼트반 밑에서 어찌어찌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미적미적 움직여서는 우리 위로 쏟아진 눈을 걷어내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칠게 움직이기도 힘든 것이 ....... 그, 그, 그....... 닿는다는 것이었다.(...)
이미 겹쳐져 있는 마당에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몸을 거칠게 움직인다는 것은,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마찰’이 가해진다는 소리다. 아니 그야 두꺼운 겨울옷 위긴 하지만.
“......나, 난 괜찮으니까, 좀 더 움직여....... 봐.”
“으, 응.”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레미안은 작은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어째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한다만;;; 그래, 일단 눈구덩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다.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온 몸을 흔들어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하아....... 하아........”
.......그리고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허리를 씀으로 인해 내 움직임은 여성의 위에서 시전하기에는 대단히 선정적으로 비치는 종류의 것이 되어 버렸다. 겨울옷 너머로 이따금씩 자극이 가해질 때마다 나와 레미안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당황해서 움찔거렸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아, 안 했어! 것 참, 힘들어 죽겠는데.......”
“.......정말이지?”
“정말이니까 집중하게 말 좀 걸지 말아줘.”
“.......알았어.”

그리고 레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나는 우리를 옭아맨 첼트반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길 바라면서 몸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무거운 돌들이 내 움직임에 따라서 조금씩 흔들렸고, 등 위의 눈들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워낙 갑갑해서 대검집에서 대검을 뽑아 첼트반을 찢어버리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그 다음에는 눈보라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일만이 남겠지. 그러니 그건 기각이다. 첼트반은 다시 세워야만 한다. 한참을 몸을 움직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칼.......”
첼트반을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고정시켜 뒀던 돌을 몇 개 정도 치워서 몸을 자유롭게 하고, 쓰러진 내 소총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 그러고 나면 고체연료 같은 거라도 어떻게든 태워서 잠깐이라도 젖은 몸을 데우고....... 그 경우, 찬바람이 들어오겠지만 환기는 해야겠지.
“......칼.”
시간도 상당히 지난 것 같으니까, 그때쯤 되면 어찌어찌 동틀 때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위치를 우선적으로 파악하면 된다. 만약 간밤에 길을 잘못 헤매서 아타만 회랑에 들어와 있는 상태라면 숨어 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서 레미안과 함께 빠져 나가는 것이 좋을까?
“......칼!”
움직인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아직도 적 영내에 머물러 있다고 할 경우, 간밤에 레미안이 ‘처리’한 세 명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돌아다닐 아타만 병사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전방 경계진지를 해 뜬 시각에 지나쳐 돌파하는 것이나, 적이 들쑤시고 돌아다니는 영역에서 해 뜬 시각에 숨어 있는 것이나, 어느 쪽이든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데.......그런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가 자꾸 들리는 거지?
“부르잖아, 이 자식아!!”
-짜악-!!
“아야!!!”
레미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아, 진짜 이 여자가!!!
“뭐 하는 짓이야!! 이........!”
아까 전부터 자꾸 두들겨 맞은 탓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레미안의 손목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만약 손목을 통해서 레미안이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대로 싸우려 들었겠지. 하지만.......
“.......레미안?”
......놀랍게도, 그녀의 손목이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뭐지?
“.......흑.......”
“.......어?”
조용해진 첼트반 안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설마겠지?
“......레, 레미안? 설마 너 지금 우는......”
“시끄러! 빨리 좀 대답하라고! 몇 번이나 부르는데 아무 말도 없으니까 무섭잖아!!”
믿을 수 없어서 조심스럽게 물으려는 순간, 그런 반응이 돌아왔다.
“으악, 미, 미, 미안!!”
또 다시 그녀의 주먹이 날아들까 눈을 질끈 감았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무섭단 말이야.”
주먹이 날아드는 대신, 뭔가가 내 목덜미를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레미안......”
당황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 레미안을 감쌌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찬바람 소리를 들으며 불편한 자세로 그녀를 안고 있자니 팔이 슬슬 저려오기 시작한다. 그때 마침내 레미안이 나를 천천히 밀어냈다.
“......”
“......”
조심스럽게 레미안을 내려다 봤지만, 여전히 어두워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왜 갑자기 그렇게 떨고 있었던 것인지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답이 없다. 도대체 왜? .......내가 대답을 안했다고? 아니, 사실 딴 생각한다고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던 거니까, 대답을 못 한 거지만.......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라면 레미안은 그런 걸로 눈물을 흘릴 여자는 절대 아니었다. 그때, 레미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칼....... 우린 여기서 얼어 죽는 걸까?”
“......레미안?”
처음 들어보는, 불안감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
“남쪽으로 걷는다고 한참 걸었지만, 솔직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칼, 넌 알겠어?”
“.......아니.”
한심스러웠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솔직히 이젠 더 걷지도 못할 것 같아. 아직은 첼트반으로 바람을 막고, 계속 움직인 덕분에 체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눈에 짓눌리면 그것도 한계야. 먹을 것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천천히 에너지와 체온이 떨어지면서 죽는 거겠지. 잠이 쏟아질 거야.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이런.......안되는데........일이.......싶었는데.......”
정확한 의료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지금의 레미안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애써 그녀를 달래보려고 시도했다.
“레미안, 진정해. 그 전에 사단 병력들이 우릴 찾으러 나올 거야.”
“밤이고,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우리가 어디 있는 줄 알고?”
“해는 뜰 거고, 눈은 얼마 가지 않아 그칠 거야.”
하지만 레미안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만약 우리가 아직 아타만 회랑에 있다면? 그땐 어떻게........ 실종자........우리를.....발견.......못하고.......으.......”
“......레미안?”
“꺄아아악! 내보내 줘, 내보내 줘!! 어두운 건 싫어, 내보내 줘!!”
그녀가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손발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왜 이러는 거야?! 진정해, 레미안!”
“칼, 칼! 날 꺼내줘, 여기서! 어두운 건 싫어, 무서워!! 엄마, 언니!! 날, 날 좀 여기서 꺼내........꺄아아아악!!”
“진정하라니까!!”
그녀를 붙잡고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봤지만, 교범에서 얼핏 본 것 같은 내용들이 잠깐씩 떠올랐다 사라지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책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애시당초 레미안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상시에 잘 하지 않던 농담 같은 걸 계속 하면서 내게 말을 걸 정도로 여유가 있었는데. 여자아이가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째서인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아인을 떠올렸다. 서로의 운명이 뒤바뀌기 전날 새벽, 늘 고압적이고 자기 멋대로 굴던 아인이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내 방 안에 서 있던 모습을 말이다. 그때의 아인에게는 뭔가 붙잡을 것이 필요했던 것 같았고....... 내 느낌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의 레미안 역시 그렇게 보였다. 의미는 다르겠지만,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붙잡고 싶은 그런 때 같다는 말이다.
물론, 내 감이 어쨌든 간에 발작을 일으키는 그녀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일단 휘둘러대는 팔을 붙잡아 그녀를 못 움직이게 한 나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엄마와 함께 살던 시절의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방법.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밤중에 무서운 꿈을 꾸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 엄마가 써 주던 방법을 떠올린 나는, 그녀의 귓가에 침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미안. 진정하고 들어줘. 너 지금 혼자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겁먹지 않아도 돼.”
“시, 싫어, 어두운 건 싫..........어.........”

그녀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 보니- 부드러운 부분.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오똑한 콧날이 있다. 요동치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그녀의 콧등에 가볍게.......키스했다. 입술에 닿는, 말랑하면서도 약간 단단한 감촉.
“......”
“......”
그 순간, 거짓말같이 그녀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성공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레미안의 어리둥절해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카, 칼?”
“진정됐어?”
대답 대신,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돌아왔다. 감정을 추스르기 시작했다는 신호겠지.
“.......으.......응.”

레미안은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 또한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나라도 그런 모습을 보인 직후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겠지.
“......고마워.”
“......어.......응.”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게 말했다. 순간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뭔가 미묘한 분위기가 쓰러진 첼트반 속에 감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응?”
갑자기 평소처럼 돌아온 그녀의 목소리에 놀란 내가 어리둥절해진 사이, 레미안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했다.
“.......칼, 너는 나를 여자로 놓고 볼 때 어떻게 생각해?”
“.......응?”
“묻는 말에 대답해.”
아니, 묻는 말인 건 나도 안다. 아는데, 그 말이 왜 나오냐는 거지.(...)
“그걸 묻는다고 해도.......”
“질문을 바꿔볼까. 만약 기회가 된다면 나랑 사귀고 싶은 마음이 있어?”
“그, 무, 무, 무슨........ 아니,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니, 그, 그러니까 넌 사귄다기보다 좋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레미안은 간단히 나를 침몰시키고 말았다.
“헤에. 사귀고 싶지도 않은 여자아이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구나, 칼은.......”
“그, 그건!!!”
레미안이 이상한 말을 하는 통에, 첼트반 속의 분위기는 일변했고 나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허둥대기 시작했다. 아니, 왜 난데없이 사람을 마음에도 없는 여자애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놈으로 만든데?(...)
“아까도 말했던 거지만, 목욕탕에서 내 가슴을 만졌던 것도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그때는 네가 덤벼들었던 거잖.......!!”
내 명예를 위해, 더듬거리면서 최선을 다해 항변하려고 했지만-
“어라, 그러면 뻔뻔하게 여탕 안까지 따라 들어온 건 어떻게 설명할 셈이야?”
“네가 안 따라가면 안 될 분위기를 만들었으니까.......”
“강제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좀 ‘강하게’ 권유했을 뿐.”
“.......뭐, 말도 아닌 소리를.......나는 널 진정.....!!”
“그러니까 칼, 너는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손에 닿는 대로 건드리고 싶어 하는 남자인 거야.”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라면, 나와 사귀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틀려?”

.......미치겠다. 갑자기 어두운 게 싫다면서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던 지 불과 1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젠 돌변해서 이상한 생트집을 잡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정말, 이 어둠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레미안에게 중압감을 주는 걸까? 하지만 아까 고맙다고 말할 적에 그녀가 제대로 돌아왔다는 확신이 섰었는데....... 그냥 착각이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이 안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금 상황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이상해졌다고 간주하고 완전히 무시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해야 되겠지.

일단 지금 그녀의 질문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레미안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불안에 떨었다.
2.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긴 하지만 다 큰 처녀애 얼굴에다가 입술을 갖다 대었다.
3. 레미안이 진정 되는가 했더니, 뭐가 불만인지 갑자기 나를 추궁해댄다. 문제는 그녀가 바라는 대답이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는 점.
Q. 왜 키스했는가?
A1. 내가 여자애 몸이라면 환장을 해서 손부터 대고 보는 호색한이라서.(...)
A2.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라면 그녀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했겠지만, 상황이 이래서 그런지 나는 이 급작스런 2지선다 문제에 뭐라고 답할 것인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레미안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생각해 보고 그녀를 추궁하려 든다 하더라도, 그녀 자신이 내 말을 막으면서 대답을 거부하고 있는 이상 그런 생각은 무의미하겠지.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레미안이 내놓은 두 개의 답지 중 하나를 택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뭐라도 대답함으로서 그녀를 현 상황에 집중시킬 수 있다면 그게 우리 둘에게는 더 좋은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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