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85) ㄴ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3월 11일 밤.

#1.

수색대대 본대가 도착한 것은, 하넬 중위의 중대가 지나간 지 1시간 정도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 자주박격포를 비롯해, 몇몇 전투지원부대들도 지나가긴 했지만 그 외에는 정말 아무런 특이 사항이 없어서, 줄리오 중위의 중대나 우리 소대는 멍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어야만 했다. 3인 1조로 볼일을 보러 다녀오기도 했는데, 근처에 아틀리아 기마순찰대원들이 있는 것을 감안하여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는 자연스럽게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홀로 떨어져 있던 우리 소대 때문인지, 대대 선두에 선 것은 1중대가 아닌 우리 2중대였다. 1소대의 레오니 소위와 라우라 중사가 고생했다는 의미로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덤으로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던 레나 무어 하사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이제 없었다.
그렇게 반쯤은 반가운 기분으로, 반쯤은 착잡한 심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자니, 뒤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우리가 따로 출발해서 한 건 병신 같은 적 기병들 열셋을 잡은 것뿐이네. 우리 같은 구시대의 유물들.”
“...어, 뭐라고요?”
뒤를 돌아보니, 아까 전부터 말없이 장갑차 후방석에 앉아 있던 알데인 소위가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한 채 나와 서있었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그런. 우리가 여기까지 온 덕에 아까 그 전차들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곧바로 투입되어야 할 곳에 투입될 수 있었던 거예요. 덕분에 테모르필을 내일 해지기 전까지 탈환할 수 있는 거고요.”
“아아, 그래. 그렇겠지요. 결국 그 탈환이라는 것도 원래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만.”
“......”
어쩔 수가 없나. 저런 가라앉은 기분은 스스로 극복하기 전에는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아예 막나가서 ‘잘난 우리 군대가 여기까지 와서 도와주니까 좀 더 고분고분하게 방긋방긋 웃으라고!!’와 같은 뻔뻔한 말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나는 못한다. 절대로.

#2.

“다 모였나?”
“네, 대대장님.”
해가 지면서 슬슬 사위에 어둔 그림자가 질 무렵, 일리야 중령은 1중대 1호차 앞에 간부들을 집합시켰다. 조명이 필요해지기 전에 상황전파를 마쳐두자는 거였다. 물론, 아틀리아 국경경비대의 줄리오 중위와 알데인 소위, 테레사 비토리아 소위, 타티아나 베르체 하사도 함께였다. 그 외의 기마 순찰대 간부들은 줄리오 중위가 주변 경계를 명령해 둬서 이 자리에 모이지 않았다. 덕분에 두 나라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공식적인’ 남자는 줄리오 중위 하나 뿐이었다.
일리야 중령은 내 쪽을 잠시 바라보고는 수고했다고 말한 뒤, 모두 바닥에 편히 앉으라고 하고선 - 아마도 그녀 자신이 키가 작아서 모든 간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 상황 전달을 시작했다.
“좋아. 다들 잘해왔다. 우리도, 그리고 거기 있는 아틀리아 국경경비대원들도. 조금씩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적의 꼬리를 놓치지 않았고, 우리 손으로 으깰 만한 놈들은 다 으깨 놨다. 또한 놈들의 정찰대를 잡은 덕에 저 앞에서 기다리는 적이 이점을 가질 수 없게 했다. 자그마한 성공이 모인다고 해서 반드시 이길 수는 없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결과를 낸다는 건 다들 잘 알고 있겠지? 우리가 낸 성과 덕에 사단 주력은 적의 지연전에 직면해 낭비했을 시간을 아꼈고, 적은 휴식과 정비를 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대대가 다시 모인 김에 저 앞에 있는 놈들도 우리 손으로 으깨주고 싶었지만...”
맙소사. 더 싸우고 싶었다는 건가? 앞에 있는 녀석들은 추격을 시작한 뒤 만나왔던 녀석들 중 가장 잘 준비된 적일 건데?
“...그래서야 우리가 공을 다 독차지하는 격이니까. 큰 차타는 도련님 일당에게 한 번 쯤 양보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안 그런가? 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든 신형 전차에게도 활약할 기회를 줘야 병기국 쪽도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고 말이다.”
역시 농담이었군. 다행한 일이다. 1중대장과 우리 중대장의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저 사람은 진짜로 시킬 것 같단 말이지. 어쩐지.
“저녁 먹기 전에 일단 상황 이야기를 좀 해 두자. 1730시 첫째. 군 단위다. 주력부대, 그러니까 강하엽병군단을 필두로 아타만 회랑 동쪽에서 밀고 올라오기로 한 부대들은 매우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다. 뭐, 녀석들이 아틀리아 영내를 거쳐 우리 측면을 기습하는 데 다수의 전차를 소모했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
아틀리아 자유국이 아닌 자치령, 그러니까 아타만 제국령은 산지가 많은 자유국 쪽과는 달리 대부분이 평야로, 아타만 제국에게 있어 중요한 식량 산지였다. 그런 곳에서 전차도 없이 공화국 기계화 부대를 맞닥뜨리게 된 아타만 제국군은 그야말로 유린당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작은 그림에서는 적 산악사단의 역습에 예상 이상으로 피를 보긴 했지만, 더 위의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 군의 상층부에서 짜놓은 계획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우리 군의 공격을 회랑 지역만을 장악하기 위한 제한적인 군사행동이라고 파악한 적은 역량을 회랑에 집중했다. 그 결정으로 인해, 적 주력은 우리 군이 미리 짜둔 포위망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동집단 아틀리아 이야기다. 적이 자유국 영내로 추가 투입되려던 아타만 산악사단은 이미 다들 알고 있다시피 우리 공군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곧 밤이 되니까 계속할 수는 없겠지만. 회랑에서 밀고 들어온 산악사단 녀석들이 전차로 증강됐던 것과는 달리, 이놈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산악사단이다. 그러니 우리 2임시산악사단 전력만으로도 상대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알마리아 임시소장 각하는 판단했다. 결론은, 그 산악사단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 다음으로 취할 행동에 딱히 변한 건 없다. 앞서 나간 친구들, 전차 2개 중대에 방호전차 3개 중대였지? 거기에 남은 1개 중대도 얼마 안 있으면 우리를 초월해 따라붙을 거다. 그 덩치들이 내일 오후까지 테모르필 읍을 공략하면, 우리는 곧바로 움직여 그곳에 가서 숙영한다. 다들 모처럼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거다. 아, 그리고 혹시 현지 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다면 식량을 산다거나, 목욕탕을 빌린다거나 하는 조치도 고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만 야외에서 숙영하면 말이지.”
그 말이 나온 순간 대대 간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들 며칠씩 씻지 못했으니까, 당연하다.
물론, 군복을 입기 시작한 뒤로 목욕탕에 좋은 추억이 없는 나로서는 웃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젠장,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피해 몰래 씻어야 하지? 역시 레미안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할 수밖에 없나? 그러고 보니 대대 간부들이 다 모인 자리인데 레미안은 어디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데 혼자 얼굴을 찌푸리고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일리야 중령이 주의 사항이랍시고 몇 마디를 추가했다.
“다만 다들 조심하도록. 아틀리아 자유국 남자들은 여자 후리는 데에 선수들이니까. 여자애들이 목욕탕으로 우글우글 몰려가면 왕성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아틀리아 남자, 줄리오 중위 쪽을 돌아본다. 하지만 줄리오 중위는 일반적인 아틀리아 남자들처럼 유들유들한 농담으로 그 상황을 넘기거나 하기 보다는,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로 딱 한 마디만을 해서 곤혹스럽기 짝이 없을 시선 집중을 간단히 물리쳤다.
“저는 유부남입니다.”
그리고 몇 군데서 터지는 한숨소리. 노리고 있었군, 노리고 있었어. 딱 봐뒀어요, 1중대장님.
“......”
그런 생각을 하다가 줄리오 중위 옆에 있던 알데인 소위와 눈이 마주쳤다. 응? 모처럼 즐거운 분위기였지만, 알데인 소위는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빛이 점점 더 붉어지는 것도 같고.

‘결국 우리가 한 건 병신 같은 적 기병들 열셋을 잡은 것뿐이네. 우리 같은 구시대의 유물들.’

어라. 어째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반짝이는 것도 같고...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
아까 전부터 이런 저런 이유로 그녀의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였는데...가뜩이나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는 와중에, 다른 나라 군인들이 자기나라 사람들이나 상관을 가지고 농담을 하는 상황을 마주하는 건 기분이 나쁜 일이리라. 어쩌면,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것을, 입장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즉각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저, 저기.”
어쩌면 지나친 간섭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표정을 보고 있는 것은 내 쪽에서 불편하다고. 일리야 중령도 농담을 하는 걸 보니 마침 상황 전파도 끝난 듯하다. 그렇다면 적당한 이유를 대서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지, 그런 이유면 되겠다.
“무슨 일이지, 아인 소위?”
대대 간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아직 질문 있느냐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괜히 입을 열었다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 행동이 최소한 알데인 소위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효과 정도는 있을 터이니 헛된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까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일을 말했다.
“아, 아까 저기 있는 알데인 소위가 저를 보호하다가 팔에 총을 맞았습니다. 응급 처치만 해둔 상태로 계속 그대로인데, 알츠 레미안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데려가고 싶습니다만.”
“흐음?”
알데인 소위는 저 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무시했다. 주제넘은 간섭이라고 해도, 욕은 나중에라도 들으면 될 일이겠지. 다행히도 일리야 중령은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면박을 주는 대신, 알데인 소위를 살폈다. 일리야 중령은 알데인 소위의 얼굴을 보고는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호응해 주었다.
“이런, 좀 더 일찍 말하지 그랬나. 설마 내 눈치를 본다고 말 안했나? 이것 참. 나도 부상자를 놔두고 더 오래 떠들 뻔했군. ...줄리오 중위! 알데인 소위의 상처를 우리 쪽 전술마법사에게 보이고 싶은데 상관없겠나?”
“네, 중령님.”
“그럼 말을 꺼낸 아인 소위가 데리고 가도록 하지? 알츠 레미안은 지금 1중대 06호차에서 부상자를 돌보고 있으니까, 빨리 데리고 가도록.”
다행이다. 예상대로 일리야 중령은 내 뜻을 알아차려 줬고, 허락도 해줬다.
“알겠습니다!”
중대장 네리아 중위를 비롯해 몇 명이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듯 내 쪽을 바라보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답해줄 수 없는 만큼 일단은 그 시선을 무시했다. 나는 급하게 알데인 소위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서서 시야를 가리고, 줄리오 중위에게 양해를 구하는 눈짓을 했다.
줄리오 중위는 아주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답해 주었다. 그도 알데인 소위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여기 모인 아틀리아 국경경비대원 중 최선임자인 만큼, 스스로 나서서 말을 꺼내기에는 애매한 입장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3.

“자, 잠깐...!!”
당황한 알데인 소위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급하게 그녀를 장갑차 반대편으로 데리고 나와 최대한 우리 대대 병사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갔다. 지금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무, 무슨 짓이에요?!”
마침 길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커다란 바위가 보여 그녀를 그 뒤로 데리고 갔다. 난데없이 이끌려 나온 그녀는, 무척 화가 나있었다. 으음. 다른 장갑차 대열에서 그렇게 멀지 않으니, 다른 대대원에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목소리, 낮추는 게 좋아요.”
그 말을 들은 알데인 소위는 당황하며 뒤쪽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다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짓이냐고요. 당신이 도대체 뭔데?”
“......”
사실 대답할 말은 궁했다. 분명 그녀는 내게 이렇게 해달라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대답 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자, 알데인 소위는 잠깐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하...! 당신, 설마 내가 울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다른 나라 군인들 앞에서 꼴사납게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걸 내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갑자기 그렇게 나를 끌고 나온 거냐고요.”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해봤자 변명이겠지. 일단 끌고 나온 이상은. 그렇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으니, 알데인 소위는 내 등을 툭툭 치면서 계속 물었다.
“뭐야...뭐냐고. 거기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이 느껴져서, 내가 마음을 놓고 펑펑 울기라도 할까봐 그래요?”
“......”
이 아가씨가 사람 머쓱해지게. 혹시라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만.
“웃기지 마요! 얼굴이 붉어진 건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재채기가 나는 걸 참아서 그렇고, 또 기분이 울적한 건 사실이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니까.”
“어, 그러면 무슨...?”
무리해서 데리고 나온 것이 헛짓이었다는 말인가.
“저, 정말...?!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서 당신에게만 말해 두겠는데...나, 나... 사실은...”
사실은?
“줄리오 중위님을 좋아해요.”
드세게 나를 힐난하던 그녀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흐음. 머릿속에서 뭔가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난데없이 이런 내용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방금 유부남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설마 당신이 부인?”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아니고! ...나는 미혼이고. 그 분은 유부남이라고요. 그 말을 그 분 입으로 직접 들으니 새삼스럽게 울적해진 것뿐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상상해서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잠깐, 아까 당신네 대장도 그렇게 생각한 거 아냐? 당신이나 그 대대장이나, 내가 우스워 보였나 보네요, 정말!”
알데인 중위는 정말로 할 말을 잃어버린 내 앞에서 그렇게 길길이 날뛰며 한참동안 화를 냈다.

그리고 해가 졌다.

한동안 흥분해서는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다는 둥, 작은 나라 사람들을 마음을 자기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전형적인 대국주의(...)라며 나를 격렬히 성토하던 알데인 소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며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뭐...뭐, 줄리오 중위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모습의 그녀가 울지 않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완전히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군. 음음.
“다 알아차렸을 거야. 이제 돌아가서 경비대 동료들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하는 건지...”
그런 그녀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은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팔을 치료 받으러 나온 거잖아요. 치료받고 돌아가면 되는 거지.”
“.....”
“총 맞은 자리는 괜찮아요?”
“아파요.”
피는 멎은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어두워서 그녀의 팔이 어떤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줄리오 중위에요?”
슬쩍 던져본 질문에 알데인 소위는 의외로 술술 대답했다.
“지적이고.”
“또?”
“차분하고.”
“또 없어요?”
“아무 여자에게나 헐떡거리지 않고.”
그건 알데인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타까운 일일지도. 아니, 안 그랬다면 좋아하지도 않았을까?
“또?”
“상냥하고.”
“얼쑤.”
나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으니, 알데인이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하아. 내가 왜 당신이랑 이런 이야기를...”
이야기가 어쩌다 여기로 흘러오게 됐는지는 나도 궁금하긴 하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죠?”
“......”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줄리오 중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듯하다.
하긴 상대가 자기 상사에 유부남이니 오죽하겠어. 공화국에서야 결혼 제도 자체가 기능하지 않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엄연히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로서 실재하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느끼는 압박감은 공화국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명백히 다를 것이다.
“...저기. 당신은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네?”
“사귀는 사람 있냐고요.”
알데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퍼뜩 대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어라, 두 사람?
“표정 보니 누군가 떠오르는 모양이네요. 어떤 남자에요?”
사위가 어둑한 데 내 얼굴을 잘 보이는 거냐.
“그, 글쎄요. 나, 남자라.”
“서, 설마, 여자?”
이러다가 아인이 돌아오면 큰일 나겠군.
“아니아니! 그건 아니고. 생각나는 사람 같은 거 없는데요.”
“시치미 떼지 말고. 내 이야기는 다 들어놓고 치사하게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그래요?”
입술을 앙다문 채 나를 올려다보는 것을 보니, 혼자서 떠들어서 비밀을 밝힌 것이 상당히 억울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야 딱히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어떻게 상대해줘야 할까.
남자. 남자. 남자라. 이런 꼴을 하고 있지만, 나도 일단은 남자라 남자를 사귄다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역시 힘든데. 내가 최근에 만난 남자라고 해봐야 아틀리아 국경경비대원들을 빼면...하나 있다. 당돌하게도 군인 ‘누나’에게 입맞춤을 한 버릇없는 꼬맹이...!
“아아! 생각나 버렸어어어...”
남자에게 키스당한 기억이. 더구나 어째서인지 그걸 떠올려도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자신이 더 혐오스럽다. 여자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좋아하는 사람 생각난다면서 반응이 왜 그래요?”
“아니, 내가 좋아한다기보다 상대가 좋아해주는데 고마우면서도 곤란하다고나 할까...”
알데인 소위가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아마 자기 처지랑 반대의 이야기를 해서 그렇겠지?
“좋아해주는 사람을 똑바로 봐줘야죠!”
“그게, 곤란하다니까요.”
아인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나지만, 나디아에게 두 번이나 입술을 빼앗겼는데 나디아의 ‘아인’에 대한 마음을 몰라줄 정도로 둔하지는 않다. 뭐, 보통 소년들이 나이 찬 누나들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만. 당연하게도, 나로서는 그런 마음에 응해 줄 도리가 없다.
“왜 곤란한데요?”
“말하기 싫어요.”
“...못생겨서?”
“그 아이가 못생겼으면 우린 다 죽어야 돼요.”
“연하라서?”
“딱히 연상이나 연하를 가리는 건 아닌데...”
“너무 들러붙어요?”
“좀 그런 감은 있어요. 다짜고짜 키스하고...아니, 잠깐.”
이 아가씨가 어느 틈에 대답을 유도하고 있잖아!(...) 그걸 깨달은 내가 화를 내자, 알데인 소위는 1승 1패라는 듯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으음. 그건 그렇고. 이번 전역을 무사히 끝마친다고 하면, 아인과 교대하기 전에는 나디아와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난 김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에요?”
“어떻게 말해야 남자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갈까요. 혹시 남자 차 본 적 있어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야 아인과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지만, 알데인 소위라면 전역이 끝나고 다시 만날 확률은 낮은 편이고 하니 물어봐도 뒤탈이 생길 가능성이 낮다.
“찰 거예요?”
“...그런 셈이죠.”
차야지. 안 그러면 나디아의 마음을 기만하는 격이니까. 사정상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하루하루긴 하지만, 연애감정에 대한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잘생기고, 연하지만 상관없고, 좋아해준다면 다시 생각해 봐도 되지 않아요?”
아니 당신이 나디아에게 감정이입 하지 말고.(...)
“아니, 그래도 안 돼요.”
내 단호한 말투에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
“그럼 그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면 될 일 아닌가요?”
그게 안 되니까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지금.
“흐음... 대뜸 생각난 것이 그 연하남이라면, 지금 당신에게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 거고. 그렇죠?”
없...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걸로 해 두자.
“그렇다면...음. 넌 좋은 ‘친구야’ 뭐 이런 거나.”
“...그거 무지 상처 줄 것 같은데요.”
남자로서 생각하기에 말이지. 넌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애인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간 내지는 취향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하는 격이잖아? 가뜩이나 성별의 벽 때문에 절망해서 여장까지 하던 애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
“외국에 유학을 간다든가?”
“저 지금 외국에서 전쟁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사실은 여자가 좋다!”
“...저기요?”
앞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기각. 어째서 자꾸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진실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디아에게 말하기에는 위험하다.
“아~아~~아! 시험문제처럼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너무 어렵네요.”
...뭐 그런 식으로 5분 정도 사랑에 빠진 10대 여자아이들이 할 법한 대화를 하던 중, 그녀의 얼굴에서 아까의 우울한 기운이 걷힌 것을 확인한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알데인 소위도 도움이 될 만한 답을 주지는 못할 것 같기도 하고 하니.
“이제 진짜 의사를 보러 가죠. 경미해도, 총상을 계속 방치하면 안 되니까. 오늘만 싸우고 말 건 아니잖아요. 곧 저녁도 먹어야 하고...”
“...네.”
멀쩡한 쪽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4.

아틀리아 자유국 쪽 부상자들은 원래 브루노 쪽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줄리오 중위의 중대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데다가 서쪽에서의 전투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 그곳을 경유해 보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더구나 적 기병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있으니 방심할 수도 없고.
지금은 우리 군단 사령부 쪽에 있는 의무대로 보내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했지만, 중립국과의 합동 작전이라는 이유로 뭔가 절차상의 문제가 있는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고 했다. 덕분에 그 부담은 고스란히 우리 대대 의무반에 돌아갔다.
“환자 보느라 바빠 죽겠는데, 이젠 내 밥 먹을 시간까지 빼앗네. 이번에는 귀여운 호빗 아가씨에게 잘 보이려고 그래?”
“...그런 거 아니거든.”
환자 둘을 실어놓은 장갑차 뒤편에서 전투식량을 늘어놓던 참인 레미안은, 내가 환자를 데려온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뭐,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혼자서 나간 건 나중에 추궁하도록 하지. 그보다 뒤에 당신, 팔 좀 보여 줘요.”
아니, 그건 일리야 중령의 명령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런 건데. 레미안 넌 아틀리아 기병대원 중상자들을 돌보느라 정신없는데 나 출동해야 될 것 같다고 일일이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아, 네.”
“장갑차 안으로. 거기! 좀 일어나 앉아요. 자리 좀 내줘요. 카...아니, 아인! 넌 방해되니 밖에서 기다려. 불빛 가려. 좁아 죽겠는데 환자도 아닌 주제에 들어오려고 그래?”
“아야.”
레미안은 장갑차 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나를 밖으로 내몰았다. 으음.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거지?
“또 어디서 심사가 꼬인 건지 원...”
“다 들려!”
“아, 아무 말도 안 했어!!”

몇 분 뒤. 1중대 06호차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나를 누군가 불렀다.
“소대원들을 보러 가지 않아도 괜찮나요?”
“앗. 중대장님.”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서서 보니, 어느 틈에 네리아 중위가 와 있었다. 전장이라 경례를 붙이지 않고 목례를 하니, 웃으면서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
잠깐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네리아 중위는, 옆에 있는 장갑차를 보며 (알데인 소위가) 안에 있느냐며 눈짓으로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잠깐 같이 가자며 손가락으로 길 바깥쪽을 가리켰다.

덧글

  • 마아가림 2015/05/31 12:18 # 답글

    아아 4일 동안이나 확인을 못했네요
    사실 27일은 제 생일이였는데요ㅋㅋ
  • 알츠마리 2015/06/01 23:22 #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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