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86) ㄴ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여긴.”
“응? 왜 그래요?”
“아니, 아닙니다.”
네리아 중위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공교롭게도 아까 알데인 소위와 이야기를 나눈 바위 옆이었다. 설마 세 번째로 올 일은 없겠지, 여기?(...)
“......”
잠깐 동안 부담스러운 침묵이 우리 둘 사이를 채웠다. 네리아 중위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던 네리아 중위는, 어딘지 어려워하는 기색으로 운을 띄웠다.
“아인, 내 생각이긴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그렇게 꽉 막힌 군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아...네.”
“목소리가 작은 걸 보니 동의하지 않나 보네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흐음.”
또다시 어려운 침묵. 어딘가 고민하는 듯해 보이던 네리아 중위는, 한숨을 쉬고선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안. 불러놓고...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오해하지 않을지 좀 고민했어요. 하지만 이래서야 시간 낭비일 뿐이겠죠?”
“오해라 하시면?”
“대대장님 앞에서 아까 그... 알데인 소위던가요? 당신은 명백하게 어색한 때에 불쑥 나서선 그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떴었죠.”
역시 그건가 싶었다.
“죄, 죄송합니...”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까의 행동을 사과하려 하자, 의외로 네리아 중위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전 당신이 그런 오해를 할까봐 걱정했던 거예요. 건방지다든지 하면서 훈계하려고 부른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할까봐 말이죠.”
“에...?”
설마 아까는 그런 이유로 부하인 ‘아인’에게 말을 꺼내는 것을 주저했던 건가. 도대체 얼마나 사람이 좋은 거야, 네리아 중위는?
“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짧게 하도록 하죠. 아까 갑자기 알데인 소위를 데려간 건 도대체 뭐였던 거죠?”
“아, 그건... 부상 때문에.”
“사실이긴 하지만 명분일 뿐이었잖아요?”
“질문하시는 요지를 잘...”
“대대장님과 뭔가 교감이 있었잖아요?”
교감이라.
“이번에도 대대장님 가정사와 관련된 일은 아니겠죠, 물론.”
“으...”
“그렇다면 내게도 설명해 줄 수 있겠지요?”
도망갈 구멍이 없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알데인 소위의 일인데... 상관이라고는 해도,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는 일단 제삼자인 네리아 중위에게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그게...”
곤란한 기색으로 우물쭈물 하고 있으려니, 네리아 중위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말하기 힘든 일이라면 굳이 들을 생각은 없지만...난 당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고 싶어요.”
“어...”
갑자기 심각한 이야기로 들어가는 건가요, 중대장님.
“직속상관으로서 레오니나 라이넬은 나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아인 소위는 내게 아직 수수께끼에요.”
“그, 그런...”
네리아 중위가 이토록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은 매우 드문데... 아무래도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 건가 생각했었죠.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 지켜보자 싶었어요. 다행히 부소대장인 버지니아 중사와 잘 지내더군요. 우리 대대에서 가장 뛰어난 부소대장과 잘 지내게 됐으니 정말 다행이라고 좋아했어요. 아마 지뢰 제거 훈련 직후였던가요?”
“......”
“시간이 좀 더 지나니 레오니나 라이넬도 당신을 좋게 여기고 친하게 지내더군요. 라이넬이야 붙임성이 좋다지만 레오니는 솔직히 좀 까다로운데 말이죠. 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대대장, 바로 그 대대장님까지!”
이 대목에 이르자, 시종일관 차분하던 네리아 중위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네리아 중위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그때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저를 포함한 각 중대장들조차 대대장님 댁에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죠. 대대 참모장교들이랑 우리들 사이에선 그게 한동안 얼마나 화젯거리였는지 모를 거예요, 아인.”
잠시 말을 멈추고,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신 네리아 중위는 내게 물었다.
“그런 당신은. 아틀리아의... 알데인 소위였던가요. 왜 그녀를 그때 데려갔어야 했던 거죠?”
꼭 알아야만 하겠다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알데인 소위에게는 미안하지만, 마냥 거부할 수만은 없겠다 싶었다.
“알데인 소위는...”
어둠 속에서, 네리아 중위는 내가 대대 간부들 앞에서 알데인 소위를 데리고 사라진 이유를 조용히 들었다.
나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알데인 소위가 이번 전역이 벌어지게 된 계기와 전개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아까 지나쳐간 우리 전차들을 보고 난 이후 그 분노가 일종의 우울함으로 변한 것 같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대대장이 자기들 중대장에게 농을 걸자 울적하던 차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는 것. 그래서 분위기가 매우 어색해질 것을 염려한 내가 급히 손을 들었고, 알데인 소위의 이상을 알아차린 일리야 중령이 허락을 해줬다는 것.
“...그래서, 아인, 당신은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서 재빨리 데리고 갔던 거군요.”
“그...그게. 네. 그렇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네리아 중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웃었다.
“후훗...아인 소위.”
“네?”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서 이제야 좀 제대로 알 것 같군요. 그동안은 솔직히, 아까 말했듯이 수수께끼 같았는데 말이죠. 당신은 어딘가 군인 같지 않았거든요.”
들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무, 무, 무슨...말씀이신지?”
어둠 속이라 여전히 네리아 중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동안 그녀의 조용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그 때문에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일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설마 정체를 들킨 건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알아차렸다면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뭐 그런 생각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가 다음에 꺼낸 말은 당신 정체를 알았다나 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인. 음... 좀 들어 줄래요? 노파심에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냥 좀 더 오래 군에서 생활한 언니의 잔소리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빈말이 아니라, 아예 흘려버려도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네리아 중위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인. 일단 수색대대 2중대장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네리아 앰버로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아까 당신이 말한 그런 논리, 아니 어쩌면 감성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싫어하지 않아요.”
“......”
“아마도 당신은, 그런...심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포용력이라고 해도 좋겠죠. 그런 재능이 있어서 모두와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분명 아인 당신에게 있어 큰 자산이겠죠? 저처럼,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에게는 정말, 정말로 부러운 재능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어요.”
“재능이라뇨... 전.”
“하지만, 부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길 바라요. 지금부터는 군인이자 중대장인 네리아 앰버로서 말하겠는데, 당신이 가진 그 포용력으로 아까 알데인 소위를 배려해준 건 아인 베리 에스코터, 당신의 감성이고 당신의 논리에요. 수색대대 2중대 2소대장으로서의 논리가 아니죠. 당신은, 다른 군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감성을 가지고 있고, 특별한 논리를 가지고 움직여요. 겉으로 보기에 다른 군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말이죠.”
“그런...”
“이해 못 하겠어요? 당신이 전입 온 뒤부터 내가 지켜본 바를 한번 말해 볼까요? 알츠 레미안은 겉으로 안 보이게 당신에게 일을 떠넘겼죠. 하지만 당신은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나쁘게 본 레오니가 그렇게 차갑게 굴었지만 당신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고, 라이넬이 짓궂은 장난을 걸어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줬죠. 참, 앤 하사가 주사를 부려도 짜증도 내지 않고 오히려 머리를 말려 줬던 적도 있죠? 약간 권위적인 산악엽병대대 소대장들 같으면 싸움을 냈을 일일지도 몰라요, 그거. 새로 온 소대장이라고 얕보는 거 아니냐면서. 그리고 아까 당신이 체면을 살려 주려고 급하게 데려나간 알데인 소위는 당신에게 온갖 불평을 했었다고 들었고요.”
“전 그저....!!”
“무엇보다도... 대대장님. 일리야 중령.”
네리아 중위는 내 입을 막고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부임한 첫 날에 대대장님이 진지로 올라가라 해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대대장님이 무리한 작전에 투입해서 또 눈밭에 파묻혀 죽을 뻔 했죠. 그 뒤로는 업무도 바쁜데 두 번이나 주말에 불러냈고,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인 자신의 가족의 일로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포로 구출 작전 보고서의 신랄한 비판 외에는 이렇다 할 짜증 한번 낸 적 없어요. 사실 그건 사단 전체의 일처리에 대한 불만이었지 대대장님에 대한 것도 아니었죠.”
“이해할 수 없네요. 지금 그게 나쁘다고, 군인답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중대장님은?”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아인,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은 공과 사를 완전히 같은 감각으로 살고 있다는 거예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아니. 공과 사를 같이하는 것과 공사를 혼동하는 건 명백히 달라요.”
부정하는 네리아 중위.
“...공사를 혼동한다는 건 공적인 일을 경시한다는 뜻을 내포하지만, 같이한다는 건 그렇지 않죠. 당신이 공사를 혼동하는 인간이었다면 나는 그저 다른 흔한 인간군상을 보는 것처럼 당신을 경멸했을 거예요. 나는 서투니까. 그런 사람과도 웃으면서 잘 지내기 힘드니까. 하지만, 공과 사를 같이한다는 건...말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신의 경우는 직접 보고 있자니 뭔가 어색해요.”
“그런...그러면 중대장님은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거죠? 레미안과 싸우고, 레오니와 라이넬에게 들이대고, 앤을 혼내고, 대대장님에게 당당하게 불만을 말했어야 하기라도 하는 건가요?”
“일부에 한해, 당신은 그럴 수도 있었겠죠. 군인으로서 옳은 선택도 있고 아닌 선택도 있어요. 그저 둥글게 사는 것이 군인의 전부는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어디까지나 부드럽고 둥글게 대처했어요. 부하에게든 상급자에게든. 나는 그게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에 관한 문제란 거예요. ...내가 보고 느낀 당신은 행동은, 그리고 그 뒤에서 느껴지는 동기는...공과 사를 함께하는 다른 군인들과는 어딘가 방향이 달라요. 지금의 당신이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설명하긴 어렵지만.”
네리아 중위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마치 모두에게 부모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닌가요?”

-동정하지도 말고, 보호하려고 하지도 마. 그녀는 선배의 ‘딸’이 아니야.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났다. 잊을 수 없는 말.......마리아의 말.
“그게 맞다는 가정 하에, 감히 말할게요. 그건 당신의 역량 밖의 일이에요. 옳은 동기가 아니라고요.”
“중대장님...”
“묻겠어요. 나도 그렇게 대할 건가요?”
“그건...”
뭔가를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네리아 중위가 내 속의 뭔가를 건드린 느낌이 들어서인지, 떠오르는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난 바라지 않아요.”
네리아 중위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도 싫은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 필요한 사람은 일차적으로 좋은 군인이지 가족이 아니에요. 가족은 온갖 불합리한 희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죠. 하지만 군인은... 아니에요. 군인은 서로에게 불합리한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 되고, 거기 부응하려고 애써서도 안 돼요. 그러면 어디선가 사고가 나게 마련이죠.”
“...저는...”
“이게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아까 말했듯이 노파심에 하는 소리나, 잔소리로 생각해도 좋아요. 무시해도 상관없어요. 화내지 않을 거니까. 아니, 정 신경이 쓰인다면 사람과 사귀는 게 서툰 제가, 그렇지 않은 당신을 질투해서 던진 자그마한 돌멩이라고 생각해도 돼요.”
어둠 속이라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동안 침묵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네리아는 할 말을 다 했고, 나는 스스로도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에, 그 침묵은 한참을 깨지지 않았다.
-휘이잉-!
차가운 산바람이 불었다. 못 박힌 듯 서있던 우리는 문득 꿈에서 깬 듯,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네리아 중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침묵을 내쫓았다.
“이상. ...내려가죠, 아인? 아직 저녁도 못 먹었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펑-! 투투툿-!!
북쪽에서 포 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우리 앞으로 진출한 부대들이 적의 지연 부대와 전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조명탄이 북쪽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하늘이 밝아짐과 동시에 포 소리가 울리는 빈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런 와중에도 21호차 승무원들, 그러니까 버지니아, 페기, 코니는 보병 탑승 칸에서 모포를 덮고 자는 중이었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하긴, 군인들은 어디서든 잘 잠들었었지. 그럼, 승무원들이 다 자는데 차장인 나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면, 당연히 중대장 네리아 중위가 아까 내게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후우...”

‘...그래, 마치 모두에게 부모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닌가요?’

네리아 중위가 한 말이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혀선 빠지지가 않으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젠장, 뭘 어쩌라는 거야.”
나는 아인 때처럼 또 뭔가 놓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마리아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여기서 듣고 있는 걸까? 네리아 중위는 결국 내가 뭘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지?
“...나 왔어.”
생각에 잠긴 채 포탑 위에 걸터앉아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레미안.”
“후...”
어찌어찌 포탑 위로 올라온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대대에 배속된 다른 의무중위와 함께 새벽의 전투에서 발생한 기마 순찰대 부상자들 중에는 중상자도 있었기 때문에 쉴 틈이라곤 없었을 테니, 당연한가?
“다른 사람들은?”
“다 자.”
“팔자 좋네.”
단단히 짜증이 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도 나름 고생했다고. 새벽에 벌어진 전투 이후로 쉬거나 하지도 못했고.
“...레미안 너는 안 자도 돼?”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오히려 잠이 안 오네.”
“엔진룸 위에 내 모포 있으니까, 덮고 한숨 자.”
“그래야지. 너는?”
“응?”
“너는 왜 안 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뭔가 할 일이라도 있는 거야? 누가 근무라도 배정했어?”
고개를 저었다. 줄리오 중위의 중대를 돕느라 고생한 덕에, 오늘 밤 우리 소대에 떨어진 근무는 하나도 없었다.
“흐응...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자는 게 좋을 거야. 일이 순조롭긴 해도. 전쟁터는 뭐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이니까.”
그렇게 말한 레미안은 엔진룸 쪽으로 향하더니 몸을 뉘였다.
“...아아. 진짜.”
그러나, 그녀는 3분 정도 있다가 다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귀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 아야?!”
깜짝 놀란 내가 레미안을 올려다봤지만,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한 채로 계속 귀를 잡아당겼다. 소리를 높이면 곤히 자고 있는 버지니아와 코니, 페기를 깨울 것 같고 해서, 일단 몸을 일으켰다.
“거기서 청승떨고 있으면 나까지 잠이 안 오니까!”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하지만 레미안은 토를 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나를 엔진룸 위로 끌고 갔다.
“소대장이 자야 될 때 안 자서 판단을 그르치면 소대원들이 위험해져. 잊었어? 전쟁 아직 안 끝났다는 걸.”
“으...응.”
소대원들이 위험해진다는 소리에 나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엉거주춤 하다가 레미안의 손에 이끌려 엔진룸 위에 누울 수밖에는.
“신경 쓰게 좀 하지 마.”
“...미안.”
그렇게 말한 레미안은 자신도 내게 등을 맞대고 누웠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웅---! 퍼엉--!
북쪽에서 여전히 은은한 포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그렇게 레미안과 등을 맞대고 누웠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상판에 깔아둔 모포를 통해 올라오는 엔진의 열, 그리고 등을 맞대고 누운 레미안의 체온이 있어서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차가운 공기보다 오히려 견디기 힘든 것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네리아 중위의 말이었다.
“......쳇.”
미테란트 공화국 육군 장교인 ‘아인’을 어떻게든 무난하게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조금 풀어져 있었던 것은 착각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장교 연기만이 문제가 아니다. 네리아 중위는 더....... 깊은 ‘뭔가’를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리아와 똑같은 말을 했으리라. 그래서 내 마음도 이렇게 심란한 거고. 군인인 네리아 중위와, 한때 군인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대학생인 마리아가 똑같이 찾아낸 내 ‘문제’란 것은...정말로 문제인 걸까? 하지만 네리아 중위는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문제는 내가 움직이는 ‘동기’에 있다고. 하지만 동기란 건 결국 보이지 않는 법이고, 실제로 따져야 하는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응?
“칼.”
“...으, 응?”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니, 잠든 줄 알았던 레미안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뒤돌아 누워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때문에 못 자고 있는 거야?”
내가 뒤척거리는 통에 깬 건가?
“시,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야.”
“거짓말.”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레미안은 딱 한마디로 그 시도를 차단해버렸다. 으음.
“말해.”
“피곤하다며. 너도 자야 되고...”
“피곤하긴 한데, 들어야겠어.”
어째서인지 레미안은 무척 단호한 태도로 나를 추궁했다.
“저기, 이건 네리아 중위랑 나 사이의 일이고...”
“네리아 중위가 뭐라고 했어?”
“......”

“흐응...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이지?”
레미안은 계속해서 나를 추궁해댔고, 그대로 뒀다가는 장갑차 안에서 자는 소대원들까지 잠에서 깰 것 같았기에, 결국 네리아 중위가 내게 해준 충고를 그녀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레미안은 그걸 다 듣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내 이마에 손을 뻗었다.
“그래서 풀이 죽어 있었구나. 불쌍한 우리 소대장님이.”
부드러운 손가락이 이마를 쓰다듬는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으... 노, 놀리지 마.”
하지만 레미안은 얼마간 내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평소랑은 좀 느낌이 다른데. 잠이 와서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레, 레미안.... 읍?”
레미안은 내 머리를 그대로 자신의 목깃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까끌한 군복, 그 뒤의 부드러운 탄력, 그리고 온기가 순간적으로 내 모든 감각을 점령했다. 따뜻한데도 몸이 떨리는 건 어째서일까?
“...그 벽창호가 할 만한 말이네. 요는 그거잖아? 네가 움직이는 동기가 일방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그런 내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미안은 조용한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
“아, 물론 나도 군대에 몸담고 있으니까. 그녀가 하는 말에 일정부분 동감은 해. 그래도...그건 결국, 그녀의...이상일 뿐이지. 안... 그래?”
“하지만.”
그래서야 아인이 돌아왔을 때, 내가 잘못 쌓아놓은 인상 때문에 곤란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누군가는 너의 그런...면을...좋...할...”
“레미안?”
“으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
“하아...”
아무래도 레미안이 잠이 깨지 않도록 몇 분 정도 이대로 있다가 다시 일어나야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좀 더 가까이...있어도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일어날 거니까.

레미안의 온기 속에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뭐가 옳은 걸까?

“소대장님?”
“으음...음?”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뭔가가 얽혀서 움직이기가 불편한데... 아, 레미안의 팔이로구나. 나, 레미안의 품에 안겨있는 건가? 어쩐지 따뜻하더라니. 그렇다면 이대로 5분 정도만 더 자도록 할...
“소대장님!”
...일이 아니로군. 자칫 다시 잠들 뻔했던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레미안의 팔을 치운 뒤 몸을 일으켰다. 눈곱이 끼어 엉망이 된 눈을 부비고 나를 깨운 사람이 누구인가 보니, 버지니아 중사였다.
“아, 버지니아... 지금 몇 시죠?”
“0605시입니다. 다들 일어날 시간이죠.”
아직 어두운 가운데, 익숙한 목소리들이 장갑차 주변에서 두런두런 들려왔다. 으음. 대충 8시간 정도 잔건가?
“으으... 추워...”
야외, 그것도 산악 지대에서 밤을 보내는 건, 아침에 일어날 때 지독하게 춥다는 것을 의미했다. 차가운 공기와 닿은 내 입김이 공기 중에서 흩어졌다.
“0640시까지 식사하고 이런 저런 준비 마치고, 0700시가 되기 전까지 대대 본부로 집합하시면 됩니다.”
“네에.... 기억하고 있어요.”
뺨을 두 차례 두들겼다.
“다른 소대원들은요?”
“소대장님과 알츠 레미안만 일어나면 됩니다.”
“이런...”
내가 제일 늦었군.
“뭐, 그렇게 편하게 주무셨으니 깨기 싫으셨을 거라는 건 이해합니다만.”
“뭐라고요?”
버지니아 중사의 얼굴을 보니, 예의 그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알츠 레미안의 품속에 파고들다시피 하면서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아, 그래. 레미안의 팔. 이런, 어제 그대로 잠들어버린 건가?;;
“페기가 어떻게 할까 물어봐서 제가 왔고요.”
그러면 이 꼴을 소대원들이 다 봐버린 거로군. 이래서야 계속 퍼지는 소문에 기름을 붓는 격이잖아. 아인이 그쪽 취향으로 찍힐지도 몰라.OTL
“...추워서 그랬다는 걸로 하죠.”
모르겠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 문제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프고... 적당히 수습한 다음에 오늘을 준비해야지.
“레미안은 하루 종일 중상자 치료한다고 바빴으니까, 5분...아니 10분만 더 놔두고, 아침 먹을 준비나 하죠. 우린.”
“알겠습니다.”
버지니아 중사가 웃으면서 장갑차 아래로 내려간 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레미안에게 내가 쓰던 모포를 덮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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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짧습니다.

덧글

  • 마아가림 2015/06/30 18:54 # 답글

    근데 왜 히로인들 보다도 칼이 더 귀엽게 느껴지는 걸까요;;
  • Artz알츠Mari마리 2015/06/30 19:18 #

    ...이 글 쓰기 시작한 이래 원래 의도 내지 제 마음 속의 인상에 가장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칼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그런 평가입니다. 당연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마아가림 2015/06/30 21:47 # 답글

    아인이 보이시한 스타일이 아니라면 칼이 이쁘장(;;)한 거라는건데요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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