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89) ㄴ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뜻밖에 다시 만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아! 오래간만이네요. 그러니까, 아인... 그래, 아인 베리 에스코터 소위죠?”
바쁘게 돌아다니던 공보과 소속 장교 중 하나가, 줄리오 중위에게 찾아둔 말먹이를 인계하고 나서 21호차 쪽으로 향하는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 대위 계급장. 손에 든 사진기.
침울한 분위기의 아틀리아 기마 순찰대원들 사이에 있다가 와서 기분이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있던 나였지만, 계급은 계급이었기에 일단 경례를 붙였다. 하지만 그녀는 경례로 답하는 대신, 활짝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만, 대위님을 어디서 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레니 아벨린. 육군 공보과 소속이고, 작년에 기차 안에서 봤었죠.”
“...아.”
나한테 캐스터네츠를 들려줬던 그 장교. 덤으로 수리를 위해 내렸던 역에서 열차 승객들을 눈밭에 모아 기념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었지. 이젠 마치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인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런데, 그렇게 잠깐 만났던 사람인 내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다니.
“생각났나 보네요?”
“네. 이런 곳에서 다시 뵙는군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니 내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저 말 몇 마디 나눠봤을 뿐인 데다가, 상급자고, 업무도 그렇고 일상도 그렇고 겹치는 부분이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인사치레로 잡담을 할 만한 분위기도, 기분도 아니었다. 곤란해 하는 내 표정을 본 레니 대위는 본론을 꺼냈다.
“사실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서요.”
“부...탁이라 하시면?”
“당신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사진이라.
“상관없습니다만, 용도는요?”
상관없다는 말에 카메라를 들어올린 그녀는, 잠깐 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며 괜찮은 구도를 잡는지 말이 없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더니 대답했다.
“그야 기관지에 싣기 위해서죠. 작년에 찍었던 사람이 다른 장소,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 독자들의 소소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다른 장소, 다른 상황. 그때 무슨 사진을 찍었는지를 기억을 더듬어 떠올렸다. 확실히, 그때는 기차가 고장 때문에 멈춰 선 곳 인근에서 양 옆에 메르세데스와 레미안을 끼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사진 찍으러 모인 사람들 앞에는 자그마한 눈사람도 하나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 내가 처한 상황이란 그런 훈훈한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잡을 수 있는 ‘내 모습’이란 무엇일까.
“그 표정 좋네요.”
플래시 불빛이 번쩍하더니, 레니 대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설명은 뭐라고 적으실 건지...?”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나온다. 레니 대위는 손가락을로 입가를 톡톡 치면서 고민하더니, 곧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선정적인 설명을 붙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그거죠. ‘학살 현장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정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만약 ‘학살 현장을 보고 분노하고 있는’, 혹은 ‘용맹한 장병들의 휴식 모습’ 뭐 이런 설명을 붙인다고 말했다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육군 공보에 ‘감정’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담고 싶다는 내 욕심이 있어서, 틈나면 이런 사진을 한 장씩 찍어둬요. 뭐, 윗선에서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고. 공화국 육군의 빛나는 전과, 학살을 저지른 아타만 제국군 성토, 그런 뻔한 내용만으로 지면을 채울 수도 있겠지만... 여기, 이곳에 있는 건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그렇다. 그게 다가 아니지.
“그러니까, 일 때문에 망자에게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지만, 우리도 이런 일을 보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거죠.”
“.....”
레니 대위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아, 좀 말이 많았나? 아무튼, 사진 찍게 해줘서 고마워요.”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별말씀을.”
“그럼, 건투를 빌게요. 난 일을 좀 마무리하러 가야겠군요.”
그렇게 말한 레니 대위는 시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가버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보니, 그녀에게는 아까의 ‘내 얼굴’이 필요했겠구나 싶었다. 공보에 ‘자신의 감정’을 담기 위해서.

테모르필을 되찾은 건 KG<엘리자베트>였지만, 학살 사건과 관련한 사고에 휘말려 장교가 부상당한 건도 있었고, 또 별다른 우회로가 없는 산악지형에서 5식 전투전차가 앞장서야 하는 상황 자체가 변한 것이 없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대신 우리 수색대대가 테모르필에 머무르며 학살 현장을 지키면서 재정비를 하게 됐다.
정찰장갑차가 아닌 방호전차로 편성되어 있어, 전차중대들을 지원하기 위해 KG<엘리자베트>에 편조되었던 3중대는 결국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KG<엘리자베트>를 따라 다시 전진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테모르필에 남은 것은 1, 2, 본부중대, 그리고 학살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위에서 파견한 공보부원들과 헌병대 소속 조사원들이 전부였다. 아틀리아 기마 순찰대 역시 말들을 쉬게 하려고 마을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사고를 우려해서인지 줄리오 중위는 마을 중앙 쪽으로는 아예 병사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우리 쪽에서 보이진 않았다. 테레사 소위들은 헌병 조사원들을 따라다니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키 큰 헌병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호빗들이 그러고 있으니 보기가 딱할 정도였다. 말먹이의 조달을 마친 알데인은 그런 테레사 소위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런 그녀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 ‘자리’는 내가 어느 한도 이상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을 집들 몇 군데를 써서 숙영한다.”
대대 지휘차 앞으로 간부들을 집합하도록 한 대대장은, 대뜸 그렇게 말을 꺼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에 밀고 들어간다고 하니 꺼림칙했는지, 간부들 사이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일리야 중령은 혀를 차고선 여느 때처럼 화난 듯이 말했다.
“왜들 그러는지 잘 안다. 빈집털이 같다는 생각도 들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 상황이나 생각해라. 당장 오늘 새벽에라도 위에서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여야 하는데, 해 떨어진 지 한참 지난 지금 숙영지를 별도로 편성할 시간이 없다. 잠을 못 자면 사고가 발생하고, 사소한 사고가 심각한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도 있다. 개전 후 지금까지 우리 대대의 ‘비전투 피해’는 2중대 21호차의 쪽문 하나다. 매우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일리야 중령이 돌연 꺼낸 말에 주변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학살 현장을 보고 난 뒤로 계속 우울함이 뒤덮고 있던 머릿속을 뭔가 싸한 것이 훑고 지나갔다. 옆에서 라이넬이 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일리야 중령이 딱히 나를 힐책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 간부들의 머릿속을 ‘현실’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말을 꺼냈을 거란 건 짐작이 갔다. 아까 레니 대위가 말했듯이, 모두들 학살 현장을 보고 나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테니까. 뭐든 좋으니 모두의 주의를 내일 해야 할 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 재료가 하필 내 소대에서 났던 접촉사고일 뿐이고.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분대별로 집 하나씩 잡고 잠이나 자도록. 야간 근무는 당직 외에는 본부중대가 광장에서 포로 감시 및 차량 경비를 맡고, 1, 2중대가 외곽 경계를 맡는다.”
“알겠습니다.”
“네.”
“그리고 이건 만에 하나를 대비한 건데, 숙영 중에 화기를 다룰 때는 주의하도록. 규모가 작긴 해도 시가지인 만큼 화재의 위험성이 있다. 혹시 모르니 광장의 아타만 포로들에게서 라이터나 부싯돌 같은 화기도 수거해라.”
화재라. 일리야 중령의 지나친 걱정인 것 같기도 하지만,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집안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가 불길에 휩싸여 대대 전멸, 뭐 이런 사태는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또, 포로들 급양 말인데,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어떻게 나눠 주도록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숙영지 편성하면서 건물에 비축된 식량이 있으면 모으도록.”
밤이 깊어서 포로들을 호송할 수 없으니 우리 대대가 먹이는 것까지 책임져야 하는 건가?
“...그런데 광장에서 먹을 게 넘어가겠습니까? 시신이...”
Ia 마야 대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거야 쟤들 사정이지. 그리고 독립 전쟁 때 게릴라 잡는답시고 마을 건물에 사람들 몰아넣고 불태우던 녀석들도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걸 본 적 있다. 그놈들 피가 어디 가겠나?”
일리야 중령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독립 전쟁 참전자로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서인지, 일리야 중령의 말도 유난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다시 말한다. 굶기지는 말 것. 하지만 잠은 광장에서 그대로 자게 할 것. 배변은 단지라도 두어 개 던져주고 날 밝으면 자기들이 비우게 해. 그리고 식량 나눠주면서 몸수색. 화기를 몰수하라고. 알았나? 날 밝으면 위에서 호송대를 보낸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저 상판대기들을 참아주면 된다.”
결국 아타만 포로들은, 자신들이 학살한 사람들 곁에서, 학살한 사람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그토록 얕보던 여자들의 감시를 받으며, 지붕도 없는 곳에서 자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지은 죄에 비하면 사소한 대가일 뿐이지만.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23시가 되어 있었다. 광장에서는 조사관들의 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소수의 인원이 400구가 넘는 시신을 하나하나 살피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일단은 의사인 레미안은 아직 우리 소대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고, 알데인도 마찬가지였다.
“소대장님! 부소대장님이 자리 잡아 놨다고, 어서 오시라던데요.”
학살당한 마을 주민들을 보고 현기증을 느낀 뒤 한동안 울적해 보이던 코니는, 지금은 좀 괜찮아졌는지 얼굴을 펴고 있었다. 일리야 중령이 한참 전부터 대대 곳곳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채근한 덕일까? 일리야 중령은 대대본부를 마야 대위에게 잠시 맡겨두고는, 평소 같으면 부하들에게 맡겨뒀을 일들에 일일이 입을 대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대대장이 직접 그러고 돌아다니니 학살 현장을 보고 넋을 잃고 있던 대대원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고.
“집 두 채를 잡았는데, 좁진 않아요. 부소대장님이 살뜰히 움직이셔서 말이죠. 3소대는 어째 살림이 영 시원찮은 집들을 잡아서 마이카가 투덜거리더라고요.”
참고로, 마이카는 라이넬 차의 포수다. 성격이 라이넬과 똑같아서, 2중대 3소대가 유난히 시끌벅적하게 보이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 소대가 묵을 집들은 전투의 피해도 거의 없고... 한 곳은 화장실이 전반적으로 좀 구식이긴 한데 어째 욕조는 사치품에 준하는 게 갖춰져 있어서, 제대로 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부소대장님이 그 집은 1호차 승무원들이 잘 곳이라고 하시던데요.”
이런 작은 마을에 그런 고급 욕조라니. 집주인이 목욕하는 데 쓰는 돈만큼은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좋겠네. 난 지금 근무인데.”
살짝 심술이 난 듯 말을 하니 코니는 살짝 당황했다.
“에... 근무셨어요?”
“당직.”
23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 중대본부에서 당직을 서야만 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하기는 글렀나?
“뭐, 자다가 일어나서 근무 서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건 그렇죠.”
잠을 늦게 자는 것보다는 얼마 못 자고 다시 일어나 근무를 서는 것이 훨씬 더 피곤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첫 근무를 선다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목욕탕에서 내 정체를 어떻게 숨길 것인가 하는 곤란한 고민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고.
“그렇게 됐으니, 근무 편성표 가져가, 코니.”

대대 본부에서 야간근무 중 주의해야 할 점을 전해들은 뒤, 가정집 한 군데를 빌려 만든 중대 본부에 들어가 간이 의자에 앉았다. 중대 본부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각각의 용무로 들락거리느라 20분 정도 소란스러웠지만, 곧 조용해졌다. 광장에서 이따금 사람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중대 본부와는 거리가 좀 있어서 별로 시끄럽거나 하진 않았다. 첫 경계 근무자들이 내게 근무 투입 신고를 하고 난 뒤로는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였다. 중대 행정병인 율리아나 하르트만 일병만이 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이제 다 자나?”
펠트키르히에 있던 주둔지 막사에서도 잠들기 전 분위기는 항상 이랬었다.
군의 수면 시간이란 것은 정해져 있는 요소지만, 개인의 생활이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소등 시간이 되기 전에 바빠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일을 빨리 끝내려고 후다닥 움직이면 한참 소란스럽다가, 불이 딱 꺼지는 순간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10분, 20분, 30분이 지나면 점차 조용해지다가 마침내 다들 잠들고 마는 것. 그것이 군인들의 일상이었다. 전쟁터에서도 그 점은 크게 변하진 않은 것 같았다.
“서류, 서류...”
모처럼 조용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고 하니, 이런 저런 보고서나 작성해 두면 되겠다 싶어서 타자기 앞에 앉았다.
-탁! 타탁-! 탁-! 타타탁-! 철컥-! 탁-!!
날짜별로 있었던 일, 소모한 물자, 특이사항을 정리해 둔 수첩을 참조해서 타자기를 두들기고 있자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국가나 조직의 이성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려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의 자세로서 옳은 걸까? 국가나 조직의 목표와 한 인간의 이성이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서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직 학살 사건의 완전한 전말은 알 수 없었지만, 400명이 넘는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학살하는 짓은 아타만 국가는 아니더라도 적군 조직 어딘가에서 명령을 내렸기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학살의 실행을 담당했던 아타만 병사들의 얼굴이 명백히 죄책감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학살이 그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사단급인지 대대급인지 그런 자세한 사정은 아직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아타만 장병들은 그들이 바라지 않던 학살 명령을 결국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기를 선택했다.

‘가족은 온갖 불합리한 희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죠. 하지만 군인은... 아니에요. 군인은 서로에게 불합리한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 되고, 거기 부응하려고 애써서도 안 돼요. 그러면 어디선가 사고가 나게 마련이죠.’

네리아 중위는 내게 - 레미안이 해준 요약에 따르자면 -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동기를 부여하거나, 거기에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중용’을 요구했다. 일리야 중령의 이야기도 한 것을 보아 그녀는 내 행동 전반, 그러니까 조직을 대할 때나 타인을 대할 때의 행동이 어딘가 맹목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타만 장병들은, 네리아 중위의 관점을 빌리자면, 그 ‘중용’을 잃고 말았던 것이리라. 누군가가 그들에게 불합리한 희생을 요구했고, 그들은 거기 부응하려고 애썼다. 스스로의 이성과 양심을 꺾어가면서까지.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은 전쟁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끝까지 ‘중용’을 지켰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리아 중위가 생각하는 그 지점을, 인간은 과연 찾을 수 있는 걸까? 자신을 둘러싼 그 많은 조직, 경험, 제도, 상황, 사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다.
가령, 이번 학살을 바다 건너 아타만 제국의 정부에서 원했을까? 아마도 아닐 확률이 높았다. 이 학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타만 제국 국가가 아니라 지금 우리 군의 북쪽에 있을 누군가였다. 그렇다면, 학살을 실행한 자들은 그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조국의 평판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학살을 실행할 당시에, 그들은 그것이 정의롭지는 않더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조직이 그런 판단 착오를 유도해내는 줄도 모르고. 하지만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살을 깎아먹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헉!!”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누군가가 등을 치는 통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뒤돌아서서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 아래?
“...여기다.”
“대, 대대장님!!”
자그마한 백금발 호빗, 일리야 라스칼 중령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뭣들 하나 싶어 둘러보러 왔다만...근무 중에 딴생각이나 하고.”
못마땅해 하는 눈빛으로 노려본다.
“죄, 죄송합니다.”
“뭐, 됐다. 자고 있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광경을 보고도 아무 생각도 없으면 그게 사람 자식이겠나.”
그렇게 말한 일리야 중령은 내가 앉아 있던 간이 의자를 끌고 가더니 자신이 앉았다. 으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군. ...그나저나 앉을 자리가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율리아나는 뭘 했기에 대대장이 오는데 기척도 안 한...
“......”
율리아나는 난처하다는 듯 웃으면서 대대장을 가리켰다.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몰래 다가오려고 입을 다물게 했군.
다시 일리야 중령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눈빛을 바꾸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제 감상이 듣고 싶으신 건가요?”
내가 되묻자, 일리야 중령은 슬쩍 웃으면서 답했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네가 이런 주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흥미가 있거든.”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뒤에 율리아나도 있는데 무슨 말씀을...
“저,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라.”
율리아나는 행정반 근무가 오래되어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일리야 중령은 율리아나의 뒷모습을 만족스럽다는 듯 보고 있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다만, 눈빛은 좀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한숨을 쉬고는 율리아나의 의자를 끌어다가 대대장 앞에 앉았다.
“...제 감상을 듣고 싶으신 건가요?”
“대답하기 곤란한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편하게 이야기해도 된다. 지금은 수색대대장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일리야 라스칼’로서 묻는 거니까.”
“...개인으로서 말인가요?”
어깨를 으쓱하면서 괜찮다는 몸짓을 하는 일리야 중령. 음... 정말로 내 생각을 듣고 싶을 뿐인 걸까? 아무리 그녀의 가정 사정에 끼어들었던 적이 있다곤 해도, 나는, ‘아인’은 어디까지나 일리야 중령의 부하 장교일 뿐. 오밤중에 찾아와 사적으로 이야기하자고 해도 신이 나서 응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로 괜찮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리야 중령과는 군의 업무나 나디아 문제 같은 중요한 일 외의 잡다한 사안으로 진지하게 이야기 해 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성비 복원 계획이 과연 뜻대로 흐를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였었지, 아마. 내 속에서 일리야 중령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계기 중 하나가 그 대화였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녀는 ‘선생님’ 밑에서 야학을 했던 것 외에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철이 든 뒤로 줄곧 군에서만 생활해 왔지만, 사안을 보는 눈이 편협해지거나 하지 않고 나름의 깊이가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기품, 정중함, 따스함이 결여되긴 했지만, 대신 간결하고, 명료했으며, 무엇보다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 흔히 하게 마련인 실수 중 하나인 ‘설교조의 장황함’이 없었다. 대신 부하의 말이 길어진다 싶으면 자르는 버릇이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아무튼, 곧잘 말이 길어지곤 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일리야 중령의 그런 말투가 부럽기까지 했다.

“...흠.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한 적 있지.”
일리야 중령이 중대본부에 들어오기 전, 홀로 생각하던 것에 대해 말을 하니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타만 녀석들 상대로 무장투쟁을 할 때 이야기다. 지금의 너보다는 좀 어릴 때였겠군. 참 암담하던 시절이었지. 아타만 녀석들은 본국에서 병력을 증파해서 우리들을 사냥했어. 당시 다른 주들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곤 했지만, 당장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 서로 연결도, 연락도 안 되고. 딱 하나 유리한 점이라고는 지역 주민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화근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숨바꼭질을 몇 번인가 하던 아타만 군은, 속편한 해결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북부주의 몇몇 마을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함으로써 ‘물과 고기’를 분리하려고 했다.
의외로 당시의 아타만 총독은 그런 식의 진압작전을 반대했던 모양이었지만, 제국 본토의 육군 사령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하에 그런 잔인한 작전을 정당화했다.
독립 봉기 자체를 공산주의 반란으로 몰아붙이면, 식민지 주민들 중에서 공산주의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과의 마찰을 유도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북부의 2개 주는 아타만 군의 지나친 강경 진압작전 및 그동안 겪었던 잔혹한 통치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적어도 이념 문제로 인한 지지층의 이탈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에게 있어 다행이었지만, 일선 진압부대 녀석들은 더욱 화가 났던 것이 분명해. 점점 정도가 심해졌던 걸 보면 말이지.”
여러 개의 유격대들로 구성된 북부지역 독립군은 그런 아타만 군의 잔혹함에 화가 났고, 내부에서는 꽤나 과격한 보복작전 제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륙에 건너와 사는 아타만 민간인들을 향한 보복을 골자로 한 작전들은, ‘선생님’을 비롯한 수뇌부 주류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통일된 전선에 균열을 낼 뻔 했을 정도로 논란이 되었다.
“당시엔 나도 보복작전을 지지했었다. 내용상으론 저 광장의 광경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것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자른다, 매단다, 찌른다, 태운다... 분노에 가득차선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 적지 않았어.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
자른다, 매단다, 찌른다, 태운다. 단순한 말 같지만, 거기에 ‘사람을’이란 단어를 붙이면 느낌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그때 나는... 좀 어렸지. 무조건 복수해야 한다고 하면 없어 보이잖나? 그래서, ‘선생님’을 설득하러 가선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적이 만행을 자제할 것이라고, 그러니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었어.”
“그럴 리가요.”
“그렇지.”
내 말을 들은 일리야 중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로, 실질적으로는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도의나 명분 면에서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일단 우월한 무력을 가진 아타만 군에 의해 몇 배의 보복이 가해질 거란 점이 명백할 뿐 아니라, 다른 주의 독립군들이 그런 과격한 행동을 벌인 북부주의 유격대와 선긋기에 나설 가능성까지 있었다.
“‘선생님’은 지도자들의 회의 때와 달리, 그런 이유들을 들며 날 설득하시거나 하진 않았어. 대신에 해 주신 말씀이 그거였지. ‘넌 있지도 않은 나라, 있지도 않은 민족에 감정이입해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냐?’고.”
“...있지도 않은 나라, 있지도 않은 민족이라...”
순간 가슴 한쪽이 덜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일리야 중령이 독립전쟁에 투신하던 시절에 우리는 나라가 없었다. 통일된 정치적 주체가 없던 상태로 400년간 식민지 상태로 지낸 지라 ‘민족’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저... 우리는 대륙 중부에 사는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 노리개가 된 딸들일 뿐이었다.
“빈틈이 많은 말이긴 했어. 차라리 회의석상에서 경고하셨던 말들을 하셨다면 그쪽이 반박하기엔 더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볼만한 말이기도 했다. 400년 전의 국가를 위해, 혹은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지도 애매한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이들을 보복의 재료로 쓴다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선생님’은 내가 그걸 생각하길 바라셨던 걸 거다.”
“그 말씀대로라면, 저 아타만 병사들은...”
일리야 중령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래. 저 놈들은 어딘가에 학살의 해야만 할 이유를 끈으로 ‘걸었지.’ 선생님 말씀대로 감정이입이라고 해도 될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과연 저들이 감정이입한 ‘무언가’는, 실체가 있는 것이었을까? 뒷날의 아타만 사람들이 사죄하거나, 가리려 들어야 할 그런 것이라도 좋으니 말야. 난 차라리 그따위 '실체'라도 좋으니 있었으면 좋겠군. 안 그러면 저 아틀리아 호빗들은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은 셈이니까.”
“......”
“뭐,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조직이나 국가에 쓸데없이 감정이입 같은 건 하지 말라고. 그런 거 강조하는 놈들치고 나중에 더러운 일 안 시키는 놈 없다. 그때 가서 국가가 날 배신했느니 군이 날 배신했느니 하며 울어봤자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걸.”
“그럼 중령님은...”
“응?”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공화국 정부에서 적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보복 작전 같은 걸로.”
“미쳤나. 내 이름 걸고 그딴 짓 하게. 물론 지금 공화국 정부나 육군이 그런 걸 시킬 위인들로 채워진 것도 아니지만, 만에 하나 그런 걸 시킬 위인들이라면 나중에 날 칭찬하기는커녕 내 독단이니 뭐니 그딴 소리로 면피나 하려들 게 분명해. 그렇다면 내가 그런 명령까지 수행해야 할 의리는 없지.”
“불이익이 돌아온다...면요?”
“난 독립전쟁과 조국 수호 전쟁에 내 청춘을 다 바쳤어... 옳은 일도 아니고, 그런 더러운 명령을 거부한 결과로 날 벼른다면 좀 많이 실망하겠지. 그래도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니 어느 정도까진 감수해 주겠지만, 정도가 심하면?”
거기까지 말한 일리야 중령은 내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땐 나도 생각을 달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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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님 홈페이지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사실, 민혁님 자금으로 유지되는 개인 홈페이지를 개인 연재공간(...)으로 몇 년간 쓰다시피 했으니, 혹시라도 닫으시기로 한 거라면 고개를 끄덕일 밖에요.

대신 팬픽은 건전노선(...)을 지향하게 되겠습니다.

덧글

  • 마아가림 2015/08/21 00:26 # 답글

    아아,요즘 좀 바빠서 늦게 읽게 되었네요;;
    항상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 마아가림 2015/08/21 00:27 # 답글

    그리고 화이트데스 쪽은 주인장 아재가 손도안데는 곳이니 지금껏 유지된게 가상하죠;;
  • Artz알츠Mari마리 2015/08/21 01:52 #

    감사합니다.

    문제는 앞으론 19금 전개를 올릴 곳이 없다는 거죠. ...바로 다음 편인데!(...)
  • 마아가림 2015/08/22 00:26 # 답글

    뭐..뭐요 다음편?!
    상대는 누구인가요
    역시 대대장님이신가요
  • Artz알츠Mari마리 2015/08/23 00:27 #

    아니... 지금 시점에 대대장과 운우지정을 나눈다는 것은 너무 뜬금없지 않습니까?;
  • 마아가림 2015/08/23 03:51 # 답글

    대대장 쨔..아니 님이 좋을뿐인데여
    그리고 주인공이라면 모름지기 어떠한 상황에서도 눕힐 수 있어야 하는법!
    큰 물건과 강한 힘은 주인공의 필수 요소입니다-원작의 하노리라던지
  • Artz알츠Mari마리 2015/08/23 13:34 #

    합법로리를 선호하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 Seattle 2015/09/01 12:31 # 삭제 답글

    다...다음편에? 진짜요?
    상대가...아인이나 앤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틀림없이 또 레미안이겠죠(쳇)
  • Artz알츠Mari마리 2015/09/01 12:54 #

    블로그로 오셨네요. ...그런데 그쪽도 뜬금없는 전개지 않습니까;; 어찌어찌 상황이 그렇게 된다 쳐도, 앤이 칼의 정체를 알아차린 시점에 신고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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