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93) ㄴ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흐음.”
전투보고서를 작성하는 건, 기본적으로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는 작업이기도 했다. 물론 기억을 더듬는다고는 해도, 모든 것이 잘 떠오를 턱이 없다.
“버지니아가 본 건 어른 둘이라고 했죠?”
그래서 같은 일을 겪은 다른 부대원에게 뭔가 물어봐야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레미안이 본 건 집 지키는 애들 둘이었고.”
“...응.”
하지만 말이다.
“버지니아가 봤다는 건 어른 둘, 정확히는 마음씨 좋게 생긴 호빗 내외.”
“네.”
서로 봤다는 게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애들 둘에 어른 둘이면 표준적인 가족 아니냐고? 일단, 아틀리아 지역은 농경지역이라 기본적으로 다산인 경우가 많지만, 뭐, 자식이 둘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그리고 내가 본 건 방 안에 있던 고양이 한 마리와 토끼 한 마리.”
이게 문제였다. 레미안과 같은 자리에 있던 내가, 아타만 해안 포대 근처에 있던 그 집 안에서 본 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나머지 소대원들은 그냥 민간인이 있다고만 우리에게 전해 들었으니 참고가 안 되고.”
레미안과 버지니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 번 양보해서, 버지니아가 본 그 내외가 집 뒤편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못 본 거라고 쳐도, 바로 옆에 있던 나와 레미안이 본 대상이 다르다는 건 뭔가 이상해.”
“그래. 난 토끼는 못 봤어. 고양이도 물론이고. 물론, 고양이는 조용하니까 내가 못 봤을 수도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저기, 레미안...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토끼가 고양이보다는 조용한 동물 아닐까?”
고양이들은 조용하지만 일단 소리를 지를 일이 생기면 사람도 움찔하게 만들 정도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피곤 때문에 불일치가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로 다르다는 건 제게도 이상하게 느껴지는군요.”
말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을 재빨리 막은 버지니아. 으음, 농담할 때가 아니라는 건가.
“네. 보통은 버지니아 중사님이 말한 대로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걸로 이 이야기를 끝내기에는 제게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요.”
“석연치 않은 점이라 하시면?”
레미안이 턱을 괸 채 눈을 가늘게 뜨고선 한동안 조용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우리가 묵묵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레미안은 좀 고민하는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수색 임무를 끝내고 난 뒤, 주민 퇴거를 위한 3일간의 휴전 중에...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식이 이상하게 붕 떠있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땐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죠.”
“너도?”
“...알츠 레미안도 그랬습니까?”
가슴이 덜컥한다. 떠오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가전 마지막 국면에, 건물 틈에 숨어있던 아타만 병사가 폭발물을 차 안에 집어넣고 나서, 한동안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받았었다. 굳이, 굳이 설명하자면 나 자신의 행동과 느낌임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뭔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참 공교롭군요.”
버지니아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느낌’에 대한 건, 말로 옮기자면 워낙 주관적인 것이니 일치하는 증상인지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만... 사실은 저도 서쪽 해안을 수색한 뒤에 알츠 레미안이 말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잠깐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간은 하루 정도였습니다만.”
“정말이세요? 아인, 너는?”
조금 고민하다가, 살짝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나도. 다만 난 우리 차가 폭발물 공격을 받기 직전까지 그런 상태였던 것 같은데.”
“잠깐만. 사흘 가까이나 그러셨다는 겁니까? 제겐 아무 이상 없어 보였습니다만...”
버지니아는 심각한 소리를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으윽. 그러고 보니 이 말은 소대장이 전투 중에 정신이 붕 떠있었다는 소리가 되는 건가?
“다행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레미안 같은 경우는 그 ‘느낌’이 자신에게 한정된 이상 증세 같은 것인가 하는 걱정이 있었었는지, 오히려 반색하는 것 같았다.
“이 느낌이 이상한 게... 분명 그 와중에도 정상적으로 생활했다는 건 기억에 있는데, 그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저도 낮잠 자면서 꿈을 꾼 건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레미안은 더욱 확신했는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은 동일한... ‘증상’을 겪은 건가?
“이런 일이 가능해?”
“집단 심리작용에 대한 것 중에 그런 게 있어. 가령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뭔가에 열중했을 때, 시간감각이 동시에 평소와 달라지는 경우라든지.”
그건 알겠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몇 번 겪어 본 것 같기도 하다. 한창 집중하다가, 수업이 끝날 때 다들 놀라곤 했지. 벌써 이 시간이야?! 하고.
“...하지만 이건 그런 것과도 다른 것 같군요. 같은 자리에 있어서 같은 것을 봤어야 할 세 사람이 다른 기억을 가졌다는 건...”
버지니아의 말에 레미안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당장 떠오르는 건... 정신계 마법을 의심할 수 있겠죠?”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우리 시대에 국제법으로 금기로 통하는 기술을 들자면 대강 이런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강력한 마법인 운석소환- 실제로 쓰인 예가 단 한 번 있었다. 어쨌든 작동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 두 번째가 과학의 발달로 인해 생겨난 화학무기와, 앞으로 사용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세균무기, 세 번째가 사람의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이다.
그 기술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군사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술들이라는 점이다. 총이나 포로 대표되는 ‘보통의’ 군사 기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성질로 인해, 그것들은 ‘금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저 ‘금기’로 정해두는 것만으로 대륙의 모두가 두 발 뻗고 잘 수는 없었다. 그 기술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진 조직인 군이 가진 속성 때문이었다.
군인들이란 기본적으로 적을 싸워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다. 이기지 못하면, 적어도 져서는 안 된다. 그게 결국 군이란 조직을 평가하는 잣대다. 조직으로서의 군은, 그리고 그 조직인인 군인들은 좋은 평가를 받아 자신들의 존재의 유용함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금기’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잘 사용하면 도시 하나가 날아가는, 잘 사용하면 상대가 시름시름 앓으며 싸우지도 못하는, 잘 사용하면 아예 상대를 이쪽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런 기술들이 국제법이라는 허술한 자물쇠만이 달려 있는 금고에 들어있는데, 관심이 동하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그것을 독점하지 못한 이상에야, 그것들은 싸우는 양측에 의해 사용되어 사람 사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할 뿐, 도의적으로나 공리적으로나 사용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는 역설적인 결론만을 남길 것이란 점은 상식을 가진 이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그래서 그것들의 사용이 금기가 된 것이고, 어느 쪽이 그런 기술을 함부로 사용하면 상대방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할 수 있다는 명분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우리에게 그것을 사용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이렇게 눈뜬 채로 당한다는 건 생각도 못 해봤는데. 아무리 그런 기술이라 해도.”
레미안은 분하다는 듯 무릎을 쳤다. 버지니아는 그런 레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레미안은 정신계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우리가 당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군. 이전에 인질 구출 작전 때도 그렇고, 레미안은 역시 마법사다 보니 정신계 마법에 대해 ‘사용할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구나 싶었다. 그게 정식 장교 교육 과정을 밟고 올라온 네리아 중위와 그녀의 큰 차이점이었을 것이고, 그때 언쟁을 벌인 이유겠지. 마법 연구소 쪽은 장교 교육 과정과 달리 전적으로 능력 위주로 사람을 선발하고 교육한다고 하니,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 하지만, 일단 마법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고 하니, 보고서에는 비고란에 세 사람이 목격한 것의 사소한 차이가 있다 정도로 적어 올리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하자, 레미안도 버지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안은 마법에 당한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 세 사람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버지니아는 아직도 긴가민가하고 있는 것 같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맞습니다. ‘누가’ 마법을 썼는지도 애매하고...”
“여차하면 연구소에 가봐야 할지도.”
그러고 보니 전에 레미안이 말했었다. 죽은 자에게서 정신조작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그 말은, 거꾸로 산 자에게서 정신조작 마법의 작용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있다는 건가?
“당연히 있지. 일단 몇 가지 기본적인 설문으로 시작하는 건데.”
“어...”
있긴 있구나. 설문으로 시작한다면 안전한 건가?
“그 다음은 최면 마법으로 기억을 조사하고, 그걸로 안 되면 약간의 외과적 처치를 동반하는데, 척수 쪽에 라인메탈로 제작한 침을...”
뭔가 살벌한 내용이다. 버지니아마저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본 나는 손을 내저어 레미안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레미안이 다른 데 가버린다고?
“위에서 보내 줄까?”
기술적인 이야기에 빠져 있던 레미안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조작여부 확인 같은 마법과 관련한 사안은 의무계통 소관이야. 이 부분만큼은 전술마법사들이 참모, 그것도 작전장교에 준할 만큼 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의심이 가는 점이 있다면 보고하고 확인받아야 할 의무가 있어. 최우선적으로.”
최우선 사항이라. 그렇다면 일리야 중령이 막고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구나.
“물론 너나 버지니아 중사님처럼 계선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데려가서 검사하는 건 절차가 복잡하지만, 나 하나라면 상관없겠지.”
“그렇지만...”
버지니아의 시선을 신경 써서 말끝을 흐렸지만, 레미안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렸다.
“확인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따져도, 길어야 1주일? 이 건에 한해서라면 공군 수송기편을 요청할 수도 있을 거고. 그러니... ‘소대의 공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한 레미안은 버지니아에게 웃어 보이더니, 내 쪽을 향해서 살짝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표정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뒤, 버지니아는 단차에 볼일이 있다고 가버리고, 둘만 남은 자리에서 레미안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선 물었다.
“왜에?”
“.....”
모르는 척 하고 수첩에 이것 저것 기록을 정리하고 있자니, 계속 쌩이질을 해댄다.
“내가 가면 곤란하기라도 해?”
“.....”
그야 곤란한 건 사실이지만, 조금 울컥하는데. 하지만...
“응? 응?”
살짝 심술궂은 미소를 지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레미안을 보니, 뭔가 뾰족하게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차갑던 그 물 속에 다시...
“곤란해.”
“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서. 일을 할 수가 없다.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미안에게 다가섰다.
“잠깐만, 카, 아, 아니 아인. 여긴...?”
1호차 승무원용 텐트지. 펴 놓은 지 한참 된. 그리고 나는 레미안의...
“으, 응?”
...손을 잡았다.
“곤란하긴 하지만, 임무잖아?”
“응...?”
“네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어. 이것저것 많이 익숙해졌으니까, 1주일 정도는 너 없이도 버텨보일게.”
마음을 다잡았다.
“...칼.”

아틀리아 반도의 동쪽을 차지하고 있던, 아타만 제국 아틀리아 자치령은 마씨니가 떨어지면서 실질적으로 소멸했다. 아직 각 도시나 마을에는 아타만 제국 자치령 행정부의 공무원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들은 도시를 하나씩 접수중인 아틀리아 자유국 국경경비대에 협조해 질서를 지키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수습하는 데에 협조적이었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자치령’이 아직 완전히 소멸한 건 아니었다. 북쪽 바다너머 아타만 제국 본국에서는, 연일 아틀리아 자치령을 우리 공화국으로부터 ‘수복’하겠다며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들은 사실상 전멸하다시피 한 ‘자치령 주둔군’을 본토에서 재편 중이었다.
거기에 아타만 함대도 밤마다 얼쩡거리며 포격을 해대는 통에, 우리 군은 며칠간 해안을 경계하는 소수 병력 외에는 10km 정도 내륙으로 이동해 있어야만 했다. 우리 공군이 아틀리아 반도 내에서 비행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 함대들이 쫓겨 간 것은 불과 나흘 전이었다.
하지만 테모르필 사건으로 인해 아타만 제국에 대한 국제적 비난여론이 거셌던 데다가, 아틀리아 자치령 자체가 아틀리아 자유국으로부터 강탈하다시피 한 지역이라는 점도 그들의 모양새를 나쁘게 만들었다.
아틀리아 외무성에서 아타만 제국의 폭거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공화국 외무성에서 그에 호응해 아틀리아 반도에서의 단계적 철군을 천명함으로써, 공화국은 여론전에서도 확연히 우세해졌다.
한편, 마씨니 포위전으로 인해 발생한 수만 명의 난민들은 자치령과 아틀리아 자유국 내의 몇몇 도시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그 과정에 건강이 악화된 노약자들이 일부 사망하는 가슴 아픈 일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봐서는 큰 문제없이 구휼이 이뤄지고 있었다. 인근 도시에 친척이 있는 경우는 가장 일이 간단했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학교와 같은 곳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그대로 도시로 돌아와 3월 아침, 혹은 저녁에 부는 찬바람을 맞으며, 파괴된 집을 고치기로 한 뚝심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육군은 폭격과 포격으로 인해 발생한 불발탄을 처리하고, 도시 기능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물자 보급을 돕기 위해 일부 전투공병 부대와 수송부대를 투입했다.

그렇게 3월 25일이 되었다.

“소대장님! 아직 안 씻으셨어요?”
수건과 비누 등을 챙겨, 임시로 마련한 야외 세면장으로 향하자니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코니가 내게 묻는다.
“아, 이것저것 할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 지금이라도 가야지 싶어서.”
언제나 그렇듯, 혼자서 씻기 위해 적당한 핑계거리를 댔을 뿐이지만.
“물은 얼마 안 남았을 건데...”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닌데.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늦은 건데.”
뭐, 아침부터 온몸에 물을 뒤집어 쓸 일은 없고 하니까. 괜찮겠지.

아틀리아 반도 정세, 그리고 마씨니의 주민들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우리 부대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우리 대대는 이번 전역에서 이래저래 30% 가량의 차량 피해를 입었다. 아, 이 30% 중에서 정비창에 보내면 다시 쓸 수 있는 정도의 손상을 입은 차량들을 빼면 실제 손실은 그보다는 적겠지만, 아무튼... 차량이 보충되기 전까진 몇몇 소대원들은 보직이 없이 멍하게 실려 다니는 처지가 되어야만 했다.
야전 정비창이 활발하게 돌아간 덕분에, 3월 20일 경에 두 대의 장갑차가 다시 쓸 수 있게 됐다는 연락이 N-11교차로의 야전 정비창으로부터 왔고, 몇몇 승무원들이 그걸 수령하기 위해 일반 차량 편으로 그곳으로 간 상태긴 했지만, 대대 정수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했다.
우리 소대의 경우, 21호차는 다행히도 멀쩡했다. 버지니아의 말대로 구동계통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대신 무전기는 파편 때문에 이것저것 상한 것이 많아서 아예 교체해야만 했다.
23호차가 격파 당했을 때 다쳤던 소대원들은 이젠 거의 다 멀쩡해졌다. 대대 본부에서 이런저런 행정업무를 거들던 두 사람, 그리고 차가 넘어질 때 뇌진탕 증세를 보였던 소피아도 말끔하게 돌아왔다. 23호차는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것 같았지만.
22호차의 경우는, 차가 차장을 닮아 튼튼한지 경상자 하나 없었다. 심지어 차에 실어둔 공구 하나조차도 다 멀쩡했다.
그리고 레미안은, 네리아 중위와 일리야 중령에게 보고하고선 정말로 공군 수송기 편으로 르제프로 가버렸다. 정신조작 여부만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부대로 돌아오겠다고는 했지만. 으음. 자신있게 다녀오라고 하긴 했지만, 난 과연 그녀 없이도 괜찮을까?

...뭐, 나와 소대의 현 상황은 이 정도다. 그래도 이만하면 아인이 돌아올 자리를 상하게 하거나 하진 않은 거겠지. 지금은 그거나 기뻐하자. 이야, 정말 잘 했어요. 최고학점!! 아, 물론 내 대학교 점수는 모두 최저점을 경신했겠지만!!

-첨벙!!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물이 묻은 머리칼을 닦으며 소대로 돌아가니, 낯선 사람 하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손에 수첩과 만년필을 들고,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호빗 남성이었는데,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반갑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친절한 장교님! 전 <제노바 트리보나tribuna>의 기자, 임마누엘 안첼로티라고 합니다.”
기자?
“어...네. 안녕하세요?”
제노바라고 하면, 아틀리아 자유국을 구성하는 여러 도시와 지역들 중 최대의 항구이자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항구 일대의 주택들이 잘 조화된 풍경을 이루고 있어서 미항으로도 유명했고. 참고로, 우리가 지금 위치한 마씨니에서 서쪽이다.
“이번 전역에 대해서 이런 저런 취재를 하고 있는데,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될까요?”
“어, 그...”
타국 언론과 함부로 접촉해도 되는 건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우리 군대는 요청이 있었다곤 해도 중립국에 들어와 있는 상태로, 아타만 제국 본국은 물론, 연합왕국과 서부연방 등 주요 강대국들의 시선을 한눈에 모으고 있는 상태였다. 전역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금방 기자를 파견할 정도면 <제노바 트리보나>는 아틀리아 자유국 국내에서는 꽤 잘 나가는 신문사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내가 경솔하게 취재에 응할 경우 아틀리아 내의 연합왕국 영사관이나 뭐 그런 데서 꼬투리를 잡을 거리를 주게 될 가능성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아아아!! 걱정 마세요. 뭐 복잡한 걸 물으려는 건 아니고... 어차피 다른 분들도 공보부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시는 반응이라, 귀국 군대에 대한 민감한 질문은 안 하려고요.”
한참 생각을 하고 있자니, 기자가 체념한 듯 그렇게 나왔다.
“음, 어디보자. 이번 전역에서 아틀리아 자유국 국경수비대와 함께 작전한 적이 있으신지?”
“네, 뭐.”
이건 괜찮을까? 우리 군대 이야기도 아니고. 고개를 끄덕이니, 기자가 눈을 빛내며 수첩을 꺼내들었다.
“어떤 부대와 함께 무슨 작전을 하셨던 거죠?”
“기, 기마 순찰대 사람들과 함께 적을 추격했었습니다.”
뭔가 기백이 느껴지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살짝 주눅이 들었다.
“아, 기마 순찰대! 좋지요. 기마 순찰대 사람들, 잘 싸우던가요?!”
그거라면 확실히 대답할 수 있지.
“네.”
“그,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용맹했다 뭐 그런 거 말고,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뭔가 좀 전문적으로다...”
뭐 이리 요구하는 게 많아?(...) 슬슬 아침이나 먹으러 가고 싶어졌지만, 그래도 이왕 대답하기로 한 건 해줘야지 싶어, 최대한 신중하게 말했다.
“음. 한 전투에서, 저와 함께 했던 기마 순찰대 1개 중대가, 산악지형인데도 적 보병을 상대로 고지를 점령하고 쳐내려가는 모습을 봤었습니다. 아타만 군은 전차를 대동한 보병이 한 1개 대대 정도 됐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유형의 공격을 당해서 그런지, 당황해서 쉽게 무너졌었죠.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 전투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겁니다.”
“음음. 그렇군요. 그 기마 순찰대 중대, 중대 맞죠? 거기 중대장의 이름은 혹시?”
“줄리오, 줄리오 펠리스 중위.”
내 말을 들은 기자는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펠리스라고 하셨습니까?”
“네.”
“하하! 하하하!! 아아!! 아아~!! 이거 행운이네요!! 특종감입니다!! 취재에 응해주셔서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쭐 수 있을까요?”
이름을 가르쳐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자의 눈길이 내 가슴께의 명찰을 재빨리 훑고 지나가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이래서야 말하지 않아도 소용없겠다 싶어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아인, 아인 베리 에스코터 소위입니다.”

기자는 기어코 덜 마른 머리를 한 내 사진까지 찍고,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으음. 뭐, 공화국 국내 신문도 아니고, 다른 나라 지방 신문에 사진 한 장 실리는 정도로는 별 일은 없겠지?

#1.

오후에는 어디서 났는지 공 하나가 중대에 굴러들어왔다. 라이넬이 주동해서 몇몇 중대원들이 공놀이를 시작했는데, 우리 소대에서는 앤을 비롯해 세 명이 참가했다. 나는 공과 별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구경만 했고.
“막아!! 아니, 아예 다리 하나씩 잡아!!”
“구기종목에서 상대 다리를 잡다니, 불공정해요, 3소대장님!!”
“다리라도 안 잡으면 막을 도리가 없는 네 몸뚱이는 공정하냐!!”
으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대화가 들려온다.(?) 뭐, 대화야 어찌됐든 앤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활약을 선보였는데, 일단 공만 잡았다 하면 폭발적으로 뛰쳐나가 상대 진영을 뒤흔들었다. 세상이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면 운동으로 대성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앤에게 내리 6점을 내주고 나자, 반대 진영을 이끌던 라이넬은 만사를 다 포기했는지 3소대원 두 명과 함께 앤에게 매달려 그녀가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가 아니구나.
“소대장님. 아무래도 이긴 것 같은데요?”
앤은 세 사람을 그대로 질질 끌고 내 쪽으로 걸어와선 웃어보였다. 도대체 저 가문의 혈통에는 뭐가 섞여 있는 걸까? 정말로 드라케라도 끼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라이넬. 앤도 못 잡는데, 드라케 잡는 건 무리겠는데요?”
앤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라이넬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으... 시끄러.”
라이넬은 전차는 막아도 앤은 못 막는구나.

#2.

일이 없으니 피곤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으니 잠이 오질 않는다. 곧 부대가 어디로 갈 거라는 이야기 정도야 이리저리 돌았지만,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이 없는 이상 마씨니를 점령한 <기동집단 아틀리아> 소속부대들은 대체로 그런 처지였다. KG<엘리자베트>와 몇몇 부대 정도만 아틀리아 자유국 수도인 브루노로 들어갔다고 들은 것 같지만,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렇게 일이 없다보니 병사들은 모처럼 한가하게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아무래도 한창 나이대의 동성끼리 모여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대화의 주제는 주로 연애 관련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남자친구하고는 그렇게 끝났어요.”
페기가 훈련 때문에 휴가가 늦어진 것이 세 번째였을 때 냅다 이별을 선고했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리고 앤이 묻는다.
“잠깐만, 그런데 페기 지금 남자친구 사귀고 있지? 몇 번째인데?”
“입대 후 다섯 번째던가 그런데요.”
그러고 보니 페기 남자친구 있었지. 그... 크기를 기술로 보충한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순간적으로 침대 위에 있는 페기의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참고로 페기의 속옷 사이즈는... 어떻게 아느냐고? 아니, 아니. 지금 신경 쓸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 지금 신경을 써야 할 건, 왜 하필 다들 내가 자려고 누워있는 첼트반 앞에 옹기종기 모여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인데. 자려고 애쓰는 소대장을 옆에 놓고 저런 불순한 이야기들이나 하고 있다니.
그 불순한 소대원들 면면을 볼작시면, 21호차의 페기, 코니, 22호차의 앤, 아이비스, 멜렌티나, 사라, 23호차의 요란, 데릴, 소피아, 까지... 르제프에 가 있는 레미안과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버지니아 빼고는 전부 다 모여 있었다. 사실 관심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앤 하사님은 지난번에 펠트키르히에서 사귄다던 사람은...”
“아아. 찼어. 벌써 한참 됐잖아?”
이거, 이거. 알데인에게 얻지 못했던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인재가, 바로 옆에 있었구먼.
“정말, 연하남은 안 된다니까? 공화국 남자답지 않게 내게 먼저 사귀어달라고 적극적으로 그러는 통에 흥미가 동해서 몇 번 만나보긴 했지만, 좀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야지. 왜 자꾸 초조하게 안달을 하고 그러는지. 이쪽은 군인이라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나올 방법 같은 건 없다고 하니까 막 잉잉 울면서 투정을 부리잖아? 그래서 외박 나가서 그냥 헤어지자 한 다음에 빌헬미나랑 술만 마시고 복귀했었어.”
냉정하구나.
“아, 그렇게 투정 부리는 남자 진짜 별로죠.”
“그래? 난 조금은 그러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 싶긴 한데... 나만 봐준다는 느낌도 들고 하니까.”
“소피아, 페기는 개보다는 고양이가 좋다는 파잖아.”
그렇게 투정 부리는 남자에 대한 의견들이 오가나 싶더니, 페기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앤에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소대장님께 주사 부리셨잖아요. 실제로는 앤 하사님도 그 남자한테 마음 있었던 거 아니세요? 심란해서 그러신 거라면 말이죠.”
그게 그날이었나! 새벽에 쳐들어와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어, 그건 넘어가자.”
“소대장님도 그걸 아셨던 건가? 그래서 앤 하사님 머리 말려주신 걸까요?”
페기의 의문 제기를 아이비스가 받았다. 아이비스 - 22호차 포수 - 는 대대 최고의 5cm포 포수답게 목표를 놓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 소대장님께 그 남자 이야기 한 적은 없는...아아, 그건 그렇고 그 이야기 하지 마.”
“뭐 어때요? 세상에 어느 소대장님이 부하의 머리를 말려줘요?”
여자들끼리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내 행동이 유별난 거였던가?
“어, 앤 하사님 얼굴 빨개진 거 보니...설마. 소대장님께는 알츠 레미안이 있잖아요?”
일어나서 뭐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소대원들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우와, 소대 내에서 삼각관계?”
“아냐, 아냐, 아냐! 소대장님한테 들릴라!”
“으악!”
잠깐 토닥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비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뭐, 아니라 하시니까 그런 줄 알게요. 후훗.”
아이비스가 어떻게 되든 말든, 페기는 그렇게 앤의 속을 살살 긁어놓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소대장님이야 취향이 좀 다르다고 치고, 버지니아 중사님은 어떨까요? 그분 남자친구 없다고 하셨죠?”
“없지.”
“타고난 군인이시잖아요. 그야말로 전사라는 느낌? 군대랑 결혼했다고 해도 믿을 걸요.”
“참, 저기, 버진 중사님이 전사라면 난 기사나 뭐 그런 거 같지 않아?”
“.....”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아마 소대원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앤은 기사가 아니라 야만용사(?)나 뭐 그런 거라고.
“그, 기사라기보다는...”
“됐어. 거기까지. 나 상처받았어? 이래봬도 진짜 기사 집안이라고. ...뭐 지금은 그냥 농장주 집안이지만.”
“그러고 보니 소대장님은 알츠 레미안과 정말로 사귀는 거 맞아요?”
“뭐야. 소문이 파다한데 소피아 너만 몰랐어?”
“아니, 아니, 저 그런 짝들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분위기가 좀 다른 것 같아서요. 뭐라고 해야 하나... 애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연합왕국 탐정 소설 중에...”
친구에 더 가까워 보인다라... 그런 걸까?
“아, 그러고 보니 소피아, 소설책 가져왔었지? 그거 나 좀 빌려줘. 그 똑똑한 탐정하고, 냉담한 조수가 사건 해결하는 거 맞지? 기회가 없어서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한번 보고 싶어.”
“냉담하다니요!! 허미즈와 웨일스에 대한 모욕이에요!! 사과하세요!! 웨일스의 가슴 속에 불타는 열정을 모르는 사람이란!!”
허미즈와 웨일스라. 연합왕국에서 유명한 연작 탐정 소설 이야기인가. 난 관심이 없어서 읽어본 적 없지만, 주변에는 읽는 사람이 꽤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지. 소피아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 미안.”
소피아에게 기가 눌렸는지, 앤은 순순히 사과했다. 소피아가 화를 내다니. 그렇게 몰두하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슬슬 졸리는군.
“아무튼. 버지니아 중사님은...걸까요?”
“그냥 ...없으셨던 것 아닐까?”
“아니아니, 듣기론...”
“그래? 내가 듣기로는 말이지, 버지니아 중사님은...”
“마법 소녀야.”
뭔가 효과음이 들려야 할 것 같은데.
“잠깐만. 뭐라고?”
놀라서 몸을 일으켜 보니, 군복을 입은 아인이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근무 끝나고 온 건가?
“마법 소녀라니까? 나 못 믿어?”
아니, 아인. 사실 버지니아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건 나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어. 며칠 전 밤에 해안에 접근해 기습 포격을 가하던 아타만 원양함대를 버지니아가 쫓아냈잖아. 안경이 번쩍 하더니 아타만 군 전함에 불길이 솟구쳤었지. 하지만, 소녀라니? 버지니아 중사가 나보다 두 살 많으니까, 그...
“사실이야, 칼. 난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의무감이 직접 파견한 거고.”
“진짜야?!”
레미안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본적인 임무도 모르고 군 생활 하고 있었어? 어떻게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네.”
“아, 그러면 앤이 버지니아와 한 소대에 있던 건 효율적인 편성을 위한 안배였던 거로구나.”
“그렇지. 모든 것은 기갑총감 각하의 계획에 따른 거야. 앤이 앞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넘기거나 전열을 헤집어놓으면 버지니아가 화력을 집중하고, 내가 둘을 지원하는 거지. 그래서 마법지원반이고.”
기갑총감이 직접 관여한 거야? 뭐, 사소한 거니까 넘어가자.
“그런데, 그럼 소대장은 왜 필요한 거지?”
“바보 동생.”
아인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친구 있다고 오해한 뒤로 처음 듣는 거라, 정말 오래간만이군 싶었다.
“마법 소녀 옆에 있는 고양이나 다람쥐 같은 거잖아.”
“고양이?”
“왜 있잖아. 어깨나 머리 위에서 재잘거리면서 분위기 살려주고, 계약도 해주고, 뱃속에서 유용한 거 꺼내주고 막.”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아인.
“소대장님. 적입니다.”
“헉, 버지니아!!”
“네?”
“그... 복장이!!”
버지니아가 부르기에 돌아보니, 그녀의 복장은 군복이 아니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깔끔한 짙은 핑크빛 스커트에, 위에는 하얀 셔츠를 꺼내 입고 있다. 그리고 금이 간 안경. 그래, 수류탄이 터질 때 날 보호해주느라 그렇게 됐지. 기회가 되면 월급을 털어서 사줘야겠다. 요 며칠간 앞이 잘 안 보이는지 가끔 부딪치기도 하곤 해서 마음이 아팠다. 아니, 그건 그렇고 그 복장은 뭔가요?!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저 앞에 있는 적 함대를 물리쳐야 합니다.”
“함대?!”
버지니아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뭔가 무진장 커다란 전함이 어두운 밤바다에 달빛을 등지고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달은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지는데 왜 북쪽 바다에 떠 있는 전함이 달을 등지고 있는 거지?!
“네. 아타만 녀석들, 마음이 급해졌는지 기갑총감님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쪽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함을 들여왔다더군요. 그게 저 배인 모양입니다. 확실히, 이름이... 야마토?”
그거 연합왕국 식민지 이름이잖아.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저 녀석이 어마어마한 구경의 주포를 장비한 강력한 전함이라는 점입니다. 저 녀석이 불을 뿜으면 지금 해안에 주둔해 있는 기동집단 아틀리아는 치명타를 입고 맙니다.”
“그건 위험한데요. 우리 해군과 공군은 뭘...”
“제가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겠지요.”
“진짜요?”
우리 군대는 정말로 버지니아로 괜찮은 건가?
“여기서 격침합니다.”
단호하고도 자신감이 가득한 말투다.
“이쯤 되면 물어보는 게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가능해요?”
버지니아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저쪽이 먼저 쏘는군요.”
“네?!”
-퍼펑-!! 퍼퍼펑-!! 펑-! 퍼퍼펑-!!
밤의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에, 여러 개의 화염이 솟구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맙소사. 저런 포탄이 우리 군 진중에 떨어지면...!!
“요격합니다.”
“네에?!!”
버지니아의 깨진 안경이 달빛을 반사해 반짝하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리고 -
-콰앙-!! 쿠쾅-!! 쾅-!! 콰콰쾅-!!
‘야마토’라 하는, 멀리서 봐도 거대한 줄 알겠다 싶은 거대한 배와 우리 사이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말이 돼?!”
“버지니아, 갑니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싶어 할 말을 잃은 나를 방치한 채, 버지니아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기냐!!”
그리고 잠시 후, 하늘에서 버지니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전함의 위쪽에서부터 몇 번인가 빛줄기가 내리꽂혔다.
-쿠쿵-!!
그러더니, 폭음과 함께 배가 세 쪽이 나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저, 저거...”
구, 구조대를 보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버지니아가 다시 날아와 내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후우. 마력을 다 써버렸습니다.”
“어, 그, 그러면 취침 시간이고 하니 자는 게...”
“마력을 보충하려면 입맞춤을 해야 합니다.”
아니, 나 욕구불만인가? 레미안이 르제프로 떠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잠깐, 지금 이거, 꿈인가? 하긴 버지니아가 안경으로 살인광선을 쏴서 전함을 격침하는 것을 본 시점에 알아차렸어야 하는 거겠지. 이 얼마나 허황된 꿈인가. 그럼, 이게 꿈인 것도 알았고 하니 이만 잠에서 깰까?
“.....”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뭐하고 있느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버지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소대장님.”
그녀는 어쩐지 촉촉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버, 버지니아.”
그러고 보면, 버지니아를 날카롭고, 의지할만한 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난 가끔 버지니아의 몸이 참 탄탄하다고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미안이 그야말로 여자아이 같다면, 버지니아는... 그래, 표범 같다고 하면 될까? 그런 느낌이니까. 멋진 군인인 그녀를 존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리고 그녀의 날카로운 면모에 조심스러워지는 것과는 다르게, 나는 버지니아의 여성성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꿀꺽-
언제 다시 이런 꿈을 꿀 수 있을까. 이대로 깨는 것도 내 뇌의 노동 생산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이 얼마나 실감나고 번쩍번쩍하는 꿈이란 말인가. 등장인물, 소품, 특수효과. 물론 꿈답게 개연성 따윈 약에 쓸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줄거리이긴 하지만, 그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은가? 정체도 모를 이세계의 전함에, 달빛이 비치는 멋진 밤바다라는 배경에, 멋진 여성이 등장하는 꿈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일부러 꾸고 싶을 정도다.
그래, 그러니까. 딱히 그녀에게 연애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입맞춤 한 번, 그것도 내 꿈속에서 하는 것뿐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 그러면...”
그렇게 버지니아의 입술이 가까워지는 순간.

“2중대, 기상하십시오!!”

불침번 근무를 서던 소피아의 기운찬 목소리를 들은 나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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