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94) ㄴ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아틀리아 자치령에 한동안 눌러앉아 있던 병력들 중 상당수, 그러니까 22군단과 강하엽병군단은 며칠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일부 공병부대가 마씨니의 몇몇 시설을 재건해주기 위해 얼마간 더 남아있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뭐, 그녀들도 그렇게 길게 있지는 않겠지.
한편, 우리 대대가 속해있는 기동집단은 자치령이 아니라 아틀리아 본국을 경유해 북부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는데, 위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우리 대대의 복귀 일정은 29일 이후로 밀렸다. 아마 원 국경경비사단 소속 병력들의 행군 거리가 가장 짧기 때문이겠지만.
사실상의 야지에서 생활하는 터라 부대원들의 몰골은 점점 말이 아니게 되어갔다. 내 개인적으로는, 전역이 끝난 뒤 휴가 계획을 짜는 데 골몰해 있었다. 휴가를 써서 아인의 행방을 파악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관한 정보를 교환한 뒤 모든 것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목표는 여전히 유효했다.
펠트키르히와 브루노를 1주일 안에 왕복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집이 멀기로는 나 못지않은 남부주 출신 대대원들에게 알아보기도 했는데, 중부주를 경유해야만 하는 열차 노선으로는 당연히 무리였고, 공군 수송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가능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 다른 방식의 계획도 생각해둬야만 했다.
우선, 펠트키르히의 민간 전화를 이용해 브루노의 우리 집으로 다시 연락을 해보는 것도 좋을 터였다. 군 전화는 교환수가 통화 내용을 다 알게 되니까 안 되고. 여태껏 두어 번 시도해 봤지만, 집이 비어 있는지 아무도 받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시 해서, 만약 아인과 연락이 된다면... 선택지가 생긴다.
르제프나, 아니, 정 안되면 펠트키르히에서 만나 교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게 성공하면 이 짓도 끝인가?”
그러면 다시 대학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일리야 중령에게 들은 대로라면 전쟁이 아틀리아 자치령에서 끝나진 않겠지만, 나는 대학생이고, 남자다. 전쟁과 무관하게 살 수는 없어도, 적어도 전선의 상황과는 관계없는 일반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모든 소동이 끝나는 것이다.
“......”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 예비역들은 뭐, 경우에 따라 다시 군복을 입어야만 한다. 현역인 아인은 말할 것도 없이 싸움터로 향하겠지.
아니, 아인만이 아니다. 버지니아, 앤, 페기, 코니, 요란, 데릴, 소피아, 아이비스, 멜렌티아, 사라, 라이넬, 레오니, 니케, 엘리자베스, 일리야 중령,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안았던 여성이자 나를 처음으로 안아준 여성, 레미안도, 싸움터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후방에 홀로 남게 된다.

“젠장.”

도대체 뭘까, 이 기분은. 나는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나? 나 자신의 일은 다 내팽개친 채로, 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아인의 옷을 입고, 거짓된 모습으로 모두를 대해야만 하는 이런 자리를...

“아인 소위님.”
“아, 엘레노아. 무슨 일이야?”
“그게 말이죠...”
28일 오후였다. 꿀꿀한 기분으로 보내고 있던 중, 엘레노아가 찾아와선 일리야 중령이 나를 불렀다고 알려줬다. 무전기를 점검하고 있던 중에 들어온 호출에, 나는 어쩐지 귀찮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대 간부들을 모두 집합시킬 때 외에 일리야 중령이 나를 따로 지명해서 부를 때는 항상 뭔가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전 자체도 끝났고, 적어도 이곳 아틀리아에서 전투임무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엘레노아와 함께 일리야 중령에게 갔다.
철갑상어낚시작전이 종결된 뒤 며칠 동안, 대대 참모들, 그리고 각 중대장들은 서류의 산에 파묻혀 지냈다. 물론, 대대의 정점에 서있는 일리야 중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대에 자신의 전횡은 있어도 폭력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대대장이었지만, 결국 그녀는 이야기 속의 임금님 같은 존재가 아니라 계선 조직의 하부에 위치한 작업 계층일 뿐이었다. 서류의 산 속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일리야 중령을 보니, 전횡도 바쁘지 않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대대장님.”
서류더미 뒤쪽에서 손만 살짝 올라온다.
“왔나? 일단 저쪽에 앉아있는 손님과 인사부터 해라.”
이 상황은 며칠 전에도 한 번 겪은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리야 중령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이곳에선 대단히 이질적인 복장을 한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다.
턱선 정도까지 짧게 친 윤기 있는 은빛 머리에, 레미안의 또렷한 눈빛과는 다르게 매우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옅은 푸른빛 눈, 입가의 보일 듯 말 듯한, 하지만 확실히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온화한 표정, 새하얀 피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보이는 요소들은 대강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인상에, 예복은 아닌 실용성 있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어서, 군인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경례를 붙이고 자기소개를 하려는 찰나, 그 ‘손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나? 그녀는 매우 예의바르게, 하지만 비굴하지는 않은, 딱 적당한 정도로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내게 먼저 말을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인 베리 에스코터 소위님. 저는 루크레티아 폰 디제라고 합니다.”
“어...네.”
너무 정중한 인사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따라 숙였다. 그런데 'von'이면...귀족 혈통인 건가, 이 사람은?
“외무성 업무와 관련해 몇 가지 협조를 구하고자 찾아뵀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외무성 업무라고? 그게 육군의 일개 소위와 무슨 상관이지?
“외무성 업무라 하시면...?”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싶어서 슬쩍 대대장 쪽을 바라보았지만, 일리야 중령은 서류 정리에 여념이 없는지 서류 더미 너머에서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공화국 정부와 아틀리아 자유국 간 정식 국교가 수립될 예정이라서 말이죠. 저는 그 전에 사전 조율을 위해서, 아, 전권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부문에 한해서일 뿐이지만요. 아무튼, 그래서 여기 파견됐다는 것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네...”
공화국과 아틀리아 자유국과는 사이에는, 독립 이래로 정식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다. 두 나라 사이에는 아타만 제국이 설치한 자치령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였다. 그리고 현실적인 힘이 없는데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나라로서 굳이 분쟁의 빌미를 줄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아틀리아 자유국은 공화국과의 국교 수립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저를 찾아오신 건지...”
“아, 그건 말이죠. 이것 때문이에요.”
루크레티아는 내게 신문 한 부를 건넸다. 무얼 보라는 건가 싶어 그 신문의 1면을 본 나는, 뜻밖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줄리오 중위인데...?”
“네. 아틀리아 국경경비대 기마순찰대의 줄리오 펠리스 중위. 며칠 전까지 제2 임시산악사단 수색대대에 배속되어 행동했었죠.”
소년 같은 얼굴을 한, 하지만 전장에서, 그리고 테모르필의 학살 현장에서조차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그 차분한 모습이 떠올랐다. 뭘 모르는 내 눈에조차도 보통 위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었지.
“무슨 기사이기에 이것 때문에 절 찾아오신 거죠?”
“내용은, 간추려 말하자면 이렇군요. ‘미테란트 육군, 아틀리아 국경수비대 기마순찰대의 전투력을 극찬’, ‘제노바의 펠리스 가 출신, 줄리오 중위가 이끄는 부대의 빼어난 활약이 있어, 미테란트 육군이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뭐 그런 기사죠.”
그 말을 들은 내 표정이 웃겨 보였는지, 루크레티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선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런 언급을 한 미테란트 장교의 이름이 나와 있더군요. ‘아인 베리 에스코터’라고.”
루크레티아는 보다 자세히, 내게 찾아온 이유를 말해줬다.
“당신이 예측했을 리는 없겠지만, 지금 그 <제노바 트리보나> 기사의 결과로 줄리오 펠리스 중위는 아틀리아 자유국에서 급격히 전쟁영웅으로 떠오르는 중인 모양이에요.”
줄리오 중위가 전쟁영웅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불려도 이상할 것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틀리아 국경경비대 전체의 실적을 모르니, 그 전과와 공훈을 논하는 데 있어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내가 봤던 줄리오 중위는 꽤 괜찮은 군인이었다는 점은 확실했다. 더구나 경사지에 진을 치고 있던 아타만 군을 향해 기병 돌격을 행하던 모습은 충분히 전쟁영웅처럼 보였다.
“그 결과로, 제네바 시의회에서는 줄리오 펠리스 중위가 정치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에요.”
정치? 내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본 루크레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가문, 그러니까 펠리스 가(家)는 제네바에서도 꽤 명망 있는 오래된 가문인 모양이에요. 역사책에 남을만한 인물도 좀 있고. 그런 가문에서, 타국, 그것도 대륙 유수의 육군 강국 장교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젊은 군인이 나온 거죠.”
“일개 소위의 칭찬을 들었다는 게 뭐가 그렇게...?”
“그들에겐 그냥 좋은 일이 필요한 거겠죠? 아무튼. 더구나 30대 중반에 가까운, 미숙하지도 노회하지도 않은 딱 좋은 나이대의 젊은 군인이 나왔어요. 아, 물론 그건 전쟁에 으레 따라붙곤 하는 일이니 딱히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에요. 진짜 문제는... 아틀리아 자유국 각 주간의 관계, 그리고 그 주들이 각각 외부 세력에 대해 가진 감정이 다르다는 점이죠. 지금부터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건데, 아틀리아 자유국 국내 정치에 대해선 좀 관심이 있는지 미리 여쭤 봐도 될까요?”
“없었는데 생겼네요.”
“네?”
루크레티아라는 이름의 그 외무성 직원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20초 전부터지만요.”
-이어지는 내 말에 살짝 웃었다.
“그건 다행이네요.”

루크레티아의 설명은 간결하고, 예의바른 어조면서도 필요한 것은 다 담고 있었다. 외무성 직원이라 그런 말이 가능한 걸까?

아무튼, 루크레티아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원래 아틀리아 자유국은 여러 개의 고만고만한 자치주들이 모여서 구성한 국가로, 중앙정부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살림살이는 가난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며 아타만 제국의 자치령 설치에 따른 지속적 주권 침해가 불러일으킨 분노로 인해,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정부로의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가는 추세였다. 하지만 각 자치주의 지도층, 나쁘게 말하자면 기득권층이라 할 만한 여러 유력 가문, 지주층은 지방 정부를 약화시킬지도 모를 변화를 수용하는 데 거부감을 보여 왔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던 차, 이번에 아타만 육군의 침입, 그리고 연이어 테모르필 학살 사건이라는 초대형 폭탄이 떨어지면서, 정부 개혁에 미온적이던 자치주 지도층들에게도 연방 정부 개혁, 그리고 제대로 된 중앙군을 창설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확산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형식상의 중앙 정부만 갖춰두고 속편하게 살던 각 자치주 지도부들이 갑자기 각성해서 최고의 결단을 내린다는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전쟁이라는 대사건을 겪고 모처럼 활기를 띠게 된 수도 브루노의 자유국 의회- 형식적이긴 해도 의회가 있었다. - 본회의장은, 현재 크게 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 앞으로의 정책 방향에 대해 연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세 파벌의 비율은 55대 40대 5 정도로, 순서대로 제1 해안파, 산악파, 제2 해안파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제1 산악파는 북부 해안의 최대 항구도시 제노바를 중심으로 한 해안 지대의 자치주들로, 산악파는 말 그대로 수도 브루노 서쪽의 산악 지대 자치주로, 그리고 제2 해안파는 서부연방과 통하는 뱃길이 있는 서쪽의 작은 항구도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로 중요한 건 그들의 성향이었다. 세 파벌은 아타만 제국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로 공통점이라고 할 만 한 것이 없었다.
그들의 특징을 매우 간단히 정리하면 이러했다.
제1 해안파의 중심 도시인 제노바. 주 산업은 무역업. 남쪽과 동쪽에 막힌 아틀리아 자유국에 온갖 물산을 공급하는 본산으로, 자유국 내에서 가장 부유했다. 주 무역 대상국은 연합왕국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친 연합왕국 성향이 강한 도시였다.
산악파의 중심은 마리노. 주 산업은 임업과 몇몇 정밀기계 제작. 척박한 지역이라 그렇게 부유하진 않은 곳이지만, 역사적으로 아틀리아 자유국이 전쟁에 얽혔을 때는 꼭 이 지역의 사람들이 중요한 활약을 펼치거나 했기에 발언권이 결코 낮지 않은 곳으로, 정식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친 공화국 성향이 강한 자치주였다.
제2 해안파는 서쪽의 작은 항구도시인 만토바. 주 산업은 무역업, 어업, 그 외에 의외로 자동차 등 동력 기계 제작. 그렇게 특이할 것 없고 힘도 약한 도시였지만, 서부연방 공산당과 끈이 있어서 아틀리아 자유국 내에서 유일하게 공산당이 세를 잡고 있는 곳으로, 친 서부연방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이쯤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지금 아틀리아 자유국에서는 향후 국가의 진로를 놓고 제1 해안파와 산악파를 중심으로 정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크게 봐서는 공화국과의 군사동맹이냐 불편부당한 중립을 유지하느냐, 그리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서부연방공화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느냐의 세 갈래로 갈려 싸우고 있지만, 실제로 그 안쪽은 좀 더 복잡하죠. 중립이라도 어느 나라에 가까운 중립인가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교역의 비중을 어느 쪽에 두느냐, 앞으로 창설된 국군을 위해선 어디와 친한 것이 최선의 선택이냐 하는 것까지 들어가면 혼란의 도가니라고밖에 할 수 없겠죠.”
-툭-
만년필을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우리의 북쪽 국경을 그런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두는 것은 좋지 않지. 이 나라에 계속 주둔할 수도 없는 이상 말이다.”
일리야 중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켰다. 잠깐 쉬기로 하신 건가?
“네, 중령님. 그 말씀대로에요.”
루크레티아는 일리야 중령을 보며 살짝 웃었다.
“이번 전역의 목적은 크게 봐서 결국 아타만 제국과 연합왕국이라는 양대 해양 세력의 대륙 교두보를 파괴하고자 하는 거였죠.”
“물론 파괴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니까. 작전 원안대로라면 아틀리아 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혹시 모를 아타만 군 내지는 연합왕국군의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최소한 1개 군단 급의 병력이 묶이게 되었겠지. 하지만 일이 원안대로 흐르지는 않았다.”
“국시를 어기고 시작한 전쟁인데다가, 중립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군사적 성과가 아무리 뛰어났던들 우리 외무성에는 재앙이었겠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타만 제국군이 먼저 아틀리아 자유국을 건드린 덕에 우리가 악당이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요.”

‘대답해줘, 아인... 더 떨어질 곳이...어디 있냐고...’

갑자기, 눈물에 젖은 알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밤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대화가 살짝 불편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내가 열렬한 애국자 같은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국이 악의 멍에를 짊어지는 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외무성의 목적은 뭐지? 그러니까, 아틀리아 자유국이 어떤 상태이길 바라냐는 말이지.”
“자세한 건 떠들고 다닐 수는 없지만, 우호적 중립, 그리고 해양 강대국의 상륙에 허무하게 당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체질 강화라고 하면 되려나요.”
“후자는 일도 아니겠지만, 전자는 불확실하다는 거로군?”
“네. 그 부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선, 인맥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낫다는 거죠. 아틀리아 자유국과 공화국은 그동안 교류가 드물었으니까요. 특히 친 연합왕국 성향이 강한 제노바 쪽은 더 그렇고요. 파견되기 전에 무역회사들 쪽으로도 협조를 구해봤지만 그렇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고 말이죠.”
여기까지 들으니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루크레티아 씨, 당신이 필요한 건 제노바 쪽의 핵심 인사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정확해요. 마침 딱 신문에 이름이 나셨기에 이렇게 찾아오게 됐답니다.”
포근해 보이는 얼굴로 빙그레 웃는 루크레티아. 반면 내 얼굴에 날아와 꽂히는 일리야 중령의 눈빛은 차가웠다.
“아니, 그렇게 형식적으로 몇 마디 답한 것 때문에 ‘줄리오 중위를 의회로!!’같은 구호가 등장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는데요.”
더구나 그 구호 때문에 외무성 사람이 나를 찾아올 거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기자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을 건데.
“그 기자 입장에서는 테모르필 사건 때문에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할 만한 기삿거리가 필요했던 거겠지. 거기에 네 이름은 양념으로 쓰인 거고.”
양념(?)이라.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퍽-
“으앗...”
한숨을 쉬면서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느 틈에 일리야 중령이 다가와 허리를 치며 말했다.
“부임한 지 1년도 안 된 소대장을 생판 남에게 빼앗기게 생긴 나나 네리아 기분만큼 나쁠까.”
잠깐. 그건 무슨 소리?
“...빼앗긴다고요? 그냥 물어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인맥이 필요하다니까요. 그 줄리오 씨와 인연이 있다면 고양이라도 데려가야 될 상황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제노바 쪽은 공화국과 정말로 끈이라고 할 것이 없어요. 이 나라의 반이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우리와 생각이 같은지, 친 미테란트 경향이 강한 산악파와 최소한의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걸 알지 못하면, 감히 말하건대 여러분이 이곳에서 한 고생은 다 헛것이 되고 말 거에요.”
“틀린 말이 아니다. 결국 군은 도구일 뿐, 무기는...”
일리야 중령은 말끝을 흐리며 루크레티아 양을 바라보았다.
“저 자신도 도구일 뿐이랍니다.”
그녀는 포근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일리야 중령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저, 소, 소대원들과 떨어질 수는...”
우리 소대가 응집력이 떨어진다고 하셨으면서 저만 딴 데 보내신다고요?
“잔말 말고 그녀를 수행해라.”
루크레티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봤지만, 일리야 중령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 곤란한데 말입니다.
“소대는 버지니아 중사가 임시로 맡으면 된다. 전역도 끝났고, 그녀는 임시로 소대장을 한 적도 있으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다. 네 소대 차도 한 대 비었으니 마침 잘 됐군.”
그렇게 나오시기입니까.
“아무나 필요해서 내 부대원을 내놓으라는 거였다면 들은 척도 안했을 거다. 그건 다른 사람을 가져다 쓸 수도 있는 문제라는 이야기거든. 하지만 말이지, 그녀는 아인, 너를 곧바로 지목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수많은 장교들 중 바로 너를 지목한 거라고.”
“......”
“사단에서도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고 하고, 내 선에서 거부할 명분이 없어. 작전이 끝나자마자 소대원들과 떨어지는 게 아쉬운 모양이지만, 나도, 너도, 그리고 네 소대원들도 모두 군인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둬라. 다행히 일이 그리 길어지진 않을 거라고 하니, 대대가 펠트키르히에 돌아가 있을 때쯤에는 모두 다시 볼 수 있겠지.”
상급자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아무리 왈패인 ‘아인’이라지만 거부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여기서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다.
“네. 알겠습니다.”
“좋다. 참, 그리고... 이건 사적인 용무다만.”
일리야 중령은 내게 편지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갑자기 웬 편지?
“나쟈가 쓴 편지다. 너한테 쓴 거다.”
“제게요?”
어리둥절한 채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보내는 사람 난은 나디아 라스칼이라고 적혀 있고, 받는 사람 난에는 분명히 내... 아니, 아인의 이름이 동글동글하고 예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지난 번 같은 불길한 검은 봉투가 아니라, 보통의 하얀 편지봉투였다.
“어, 왜 제게 편지를...?”
“받을 자격이 된다. 넌.”
일리야 중령은 그렇게 말하고선 굳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 바, 받을 자격이라 하시면?”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여느 때와 같이 일방적인 요구가 이어졌다.
“알고 있겠지만,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신 검열은 허가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일단 나디아의 엄마...로서, 그 내용이 알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저, 저기. 중령님께는 편지 안 썼나요, 나디아는?”
“썼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더 알고 싶으시다는 거로군요.
“여기서 읽어 주겠나?”
“하지만. 나디아가 제게 편지를 따로 썼다고 한다면, 그건 제가 혼자 읽을 거라고 믿고 쓴 건데요?”
바로 얼마 전에 가출 소동을 벌였던 가족이고 하니,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편지를 돌려본다고 하는 건 상식에 어긋나는 짓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태세를 단호하게 다잡았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읽고 신경을 쓰실 만한 내용이 있을 경우 따로 알려드렸으면 합니다. ...괜찮죠?”
“흐음.”
일리야 중령은 납득한 건지 아닌지 미묘한 표정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고선 생각에 잠겼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기 때문에,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으음. 설마 이런 데서 지위를 앞세워 편지를 강제로 열게 할 사람인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족, 그것도 얼마 전 소동을 일으킨 가족이고 하면 초조해서라도 안하던 일을 할 가능성도...
“아인. 나쟈와 무슨 일 있었나?”
...있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들어오는 건가!!
“무, 무무, 무, 무슨 일이라니요?!”
주변에서 시선이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타자기 앞에 앉아 있던 Ia 마야 베른 대위, 저쪽에서 나를 보고 있는 엘레노아, 그밖에 대대 행정병 몇 명까지. 이, 이래서야 아인이 심각한 오해를 받게 되는데...
“그럴 거라고 생각진 않았는데, 아인 네가 편지를 굳이 숨기려 드는 걸 보니... 나쟈도 일단은 남자애고 말이다.”
“아직 편지를 펼쳐본 것도 아닌데 억측은 하지 말아 주세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흥미가 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날 네가 부대로 돌아가기 전에 나쟈와 둘만 있을 시간도 있었지.”
“둘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는 억측도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증명해봐라.”
“.....”
증명해야 되는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행위로써 몸의 결백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겁니까?!

...어떻게 그 곤경을 넘겼는지에 대한 것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결론만 말하자면, 다행히도 나디아의 편지를 대대장 앞에서 낭독하는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인’이 대대장의 아들과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대대에 퍼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아.

“외교관 수행 임무면 최소한 수색대대 1개 소대쯤은 붙어서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대답해주세요~ 소대장님~”
“앤. 그렇게 붙어 있으면 보고서 작성을 못 끝내.”
루크레티아 양을 수행하는 임무가 떨어졌다고 해서 소대장으로서의 업무를 내팽개치고 가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소대로 돌아온 나는 급하게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문제는, 어느 틈에 소문이 퍼졌는지, 앤을 필두로 한 소대원들이 내 주변을 떠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갑차 끌고 중립국 수도 한가운데서 돌아다니면 그것도 보기 좀 그렇잖아.”
“이제 가면 언제 오시는 건데요?”
앤이 내 어깨에 턱을 괴는 통에, 나는 타자기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면, 아인이 가끔 이랬었지.
“기, 길면 한 달 정도?”
뺨에 앤의 숨결이 와 닿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애써 무시하는 척하며 보고서 작성을 하던 내게, 앤은 그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작전도 끝나고 마음껏 들러붙을 수 있게 됐는데, 이렇게 도망가시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 약속(?)을 잊어줄 생각은 없는 것 같군.
“저기, 왜 그렇게 들러붙고 싶어 하는 건데? 나보다는 사라 쪽이 부드럽고 좋잖아.”
참고로 사라는 22호차 무전수로, 북부주 출신이었고, 살짝 통통한 여자아이였다. 단순히 부드러운 것을 안고 싶을 뿐이라면, 나보다는 그녀 쪽이 더 나을 텐데.
“사랑은 움직이는 거예요.”
아이고 머리야.
“마음대로 해. 눈과 손만 방해하지 말아줘.”
그 말에 딱 하나가 변했다. 목에 두르고 있던 손을 허리 쪽으로 옮겼다는 것.
“...나라고 예정에도 없는 차출이 뭐가 좋겠어? 소대에 있는 게 편하지. ...그렇게 계속 달라붙을 거라면 차출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등 뒤에 느껴지는 감촉이 정신건강에 해로워.
“에에~ 너무하세요.”
뒤에서 다른 소대원들이 킥킥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고.
“적당히 못 하겠나.”
“아야야야...머, 머리!! 헉, 버, 버진 중사님.”
“버진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앤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그 상황을 끝낸 것은 믿음직한 부소대장이었다. 안경에 금이 간 뒤로 아직 새 안경을 구하지 못한 탓에, 요 며칠 사이에는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으려 해서 차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평소처럼 귀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머리끄덩이를 잡는 것도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러는 거려나.
“아, 버지니아.”
“대대 통신과에서 전해주더군요. 무전기들은 의외로 진공관 깨진 것도 없다고. 큰 이상은 없지만 혹시 몰라서 입고 넣었고, 예비품을 줄 테니 그걸 쓰랍니다. 그리고 파편 맞은 배선들은 떼서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파편 맞은 배선이라. 그걸 골라내려면 정비병들도 좀 붙어야 될 건데.
“언제까지 수리될 것 같나요?”
“통신과가 별로 바쁘지 않아 보였으니까, 그쪽 정비병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오늘내일 중에 될 것 같습니다.”
내 차는 당분간 통신 불능인가. 뭐, 이번 전역 자체가 종결된 상황이고 하니 별 문제는 없겠지. 그것보다 문제는...
“그것보다 문제는, 소대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다는 거로군요.”
“...네.”
한숨을 쉬며 버지니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도 이미 들었군.
“어떻게 된 게 전쟁 중일 때보다 더 바쁘군요. 알츠 레미안은 르제프로, 소대장님은 브루노로. 저흰 펠트키르히로.”
“그렇죠? 기자란 사람들 함부로 상대할 일이 아니네요. 일이 이렇게까지 귀찮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귀여운 호빗들을 만나러 갈 수 있어 기쁘신 건 아닙니까?”
놀라서 바라보니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라도 들으신 건가요?”
나온 대답은 불길한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수준의 것이었다.
“사실은, 대대 전체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소대장님께서 일리야 중령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른다면서...”
“......”
여자, 그러니까 레미안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나는 것과 남자, 즉 나디아와 사귄다고 소문나는 것 중 어느 쪽이 아인이 돌아왔을 때 충격을 덜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내가 아인에게 안 맞고 넘어갈 방법은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 소문, 믿으세요?”
“그냥 챙겨주기 좋아하시는 걸 대대장님이나 남자아이 쪽에서 착각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버지니아다운 냉철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니, 그냥 그런 소문을 낸 사람 쪽의 착각일 뿐이에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런 말 뭣하지만...”
“대대장님 아드님이 진짜 귀엽게 생겼다면서요?!”
아직도 머리끄덩이를 붙잡힌 채 있던 앤이 슬쩍 끼어들었다.
“소개시켜 줄까?”
어지간히 놀려대라, 좀. 나도 모르게 살짝 화가 나서 심술궂게 쏘아붙였다. 앤은 펠트키르히에서 사귀던 남자친구도 찼다고 했었지, 그러고 보니.
“아하하. 아무리 그래도 대대장님 아드님이면 좀 그러네요.”
“그래. 하지만 걔가 대대장님 아들이면서 동시에 고민이 있는 한 사람의 청소년이라는 점은 알아둬. 나도 그 녀석 얼굴에 혹해서 뭘 어쩔 생각 같은 건 없고. 그 두 가지만은 명심해뒀으면 좋겠는데.”
살짝 강한 어조로 못을 박아 두니, 버지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앤도 얼굴을 살짝 굳히며 대답했다.
“어... 넵.”
“좋아. 음... 버지니아, 별 일 없으면 이만 쉬어 두도록 해요. 난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 중대장님께도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아! 아인 소위. 방금 들었는데 당신이 대대장님의 며느릿감으로 낙점을 받았다고...”
...중대장님까지 그러시깁니까! 네리아 중위답지 않게 뭔가 굉장히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녀에게도 확실히 못박아둬야 하겠구나 싶었다.
“아닙니다. 절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다음, 급히 마무리를 지은 지난 전투 보고서와 이런 저런 서류들을 제출했다. 앤과 달리, 네리아 중위는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디아에 대한 것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표정은 그대로인 것으로 봐서, 처음부터 며느릿감 어쩌고 하는 말들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대대장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그 외무성 사람이 여기저기 서성거리고 있는 것도 봤고요. 기간은 어느 정도가 될 거라고 들었나요?”
“길면 1개월 정도일 거라고 했습니다.”
“1개월.”
네리아 중위는 뭔가 생각하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저는 당신에 대한 걸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는군요?”
약간 힐난하는 듯해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지난 번 알데인 소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걸로 당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더구나 당신의 문제도 아니죠. 그냥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을 뿐.”
작게 한숨을 내쉰 네리아 중위는, 내가 제출한 서류를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움츠러들 필요는 없어요. 솔직히 말해, 중대라는 한 조직의 책임자로서는 살짝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외무성 사람이 할 일은 이 나라와 우리 공화국 간의 중요한 일이겠죠. 이 전역에서 흘린 피를 무의미하게 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군인으로서는 가는 게 맞습니다.”
“...네.”
“그러니 어깨를 펴세요.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데 당신이 가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지목한 거잖아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딱히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당신 쪽이 더 바쁠지도 모르죠.”
격려...해주시는 건가?
“물론 그녀가 당신을 외교 일선에 내세울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러두는 말인데, 부디 미테란트 육군 장교로서 신중하게 처신해 주길 바라요. 지난번처럼 섣불리 기자의 취재에 응하거나 하지 말고요. 어쩐지 당신은 자꾸 제 손에서 벗어나는군요.”
역시, 아무 말도 없이 넘어가주지는 않는구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이자, 네리아 중위는 살짝 웃었다.
“참. 한 달이나 타국에서 활동한다고 하면 사복이 필요할 건데, 적당한 건 있나요?”
“아뇨. 행낭을 가볍게 하려고 전부 막사에 두고 왔습니다. 하지만 정복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 정도면 되겠죠. 이만 가도 좋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언질이나 줘요.”
“네. 알겠습니다!”

“결국 또 너 혼자만 따로 놀게 됐다는 거로군? 응?”
“우우, 아인. 혼자만 고속 출세하려고 그래? 키 크면 다야? 키다리 2소대라 이거야?”
다른 소대장 두 사람 또한 나를 그냥 보내주진 않았다. 일리야 중령에게 옮기라도 한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1소대장 레오니 슈나이더 소위와, 그와 대조적으로 내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선 방글방글 웃고 있는 3소대장 라이넬 란스호른 소위.
“...키와 출세 속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라이넬. 그리고 저도 소대원들 두고 혼자 가고 싶지 않아요, 레오니.”
라이넬이 날 좌우로 흔들려고 들기에 거기에 맞춰 좌우로 율동을 하며- 레오니는 한심하다는 듯 우리 둘을 바라봤지만 -서 있자니, 레오니가 혀를 차면서 내게 뭔가를 건넸다.
“너, 관급 권총 쓰지?”
“네? 어, 이건...”
레오니의 손에는, 공화국 육군 제식 권총보다 좀 작은 편인, 총열 윗부분이 살짝 드러나 있는, 무기에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상당히 예쁘게 생긴 자동권총이 들려 있었다.
“안 받고 뭐해?”
생각났다. 이건 레오니 자기가 쓰던 권총이 아닌가?
“고참이 선물하잖아. 안 받고 뭐하니?”
라이넬이 좌우 율동을 멈추고 내 손을 붙잡아 물건을 공손히 받는 자세를 잡아 주었다. 조금 얼떨떨해진 상태로 손을 내밀고 있으니, 레오니가 내 손에 권총과 예비 탄창 두 개를 얹어 주었다.
“탄은 제식이랑 같아. 무게는 비슷한데 그래도 조금 더 무겁고... 뭐 그 정도군. 그리고 관급 권총 같은 건 쓰지 마. 바로 얼마 전에도 KG<엘리자베트>에서 사고 났다고 그러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멋쩍은지, 레오니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참, 아직 대답을 안 했군.
“고, 고마워요.”
“흥, 별 말씀을.”
“하지만 그러면 레오니는 총이 없는 게...”
퍼뜩 생각이 들어 말끝을 흐리며 물으니, 레오니는 자신의 권총집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다른 권총이 한 자루 꽂혀 있었다.
“하나 생겼거든.”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아무튼, 잘 다녀와서 빨리 출세해라. 이런 데서 구르지 말고.”
내뱉듯이 말하고는 자신의 소대 쪽으로 가버렸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옆구리 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라이넬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귀띔을 했다.
“...저거, 레나 무어 하사 권총이야.”
“아...”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소리가 나왔다. 그래... 나보다 한 살 어리면서도 어딘가 달관한 듯, 늘 보기 나쁘지 않은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짓고 다니던, 12호차 차장 레나 무어 하사. 중대원들, 아니 대대원들 중 그녀와 사이가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버지니아나 앤처럼 특출한 데는 없어도, 누구라도 그녀라면 무슨 일에서든 의지할 수 있다고 여기던, 그런 사람이었다.
“며칠 전에 중대 정비반에서 피격당한 차들 이래저래 조사하다가 찾았대.”
“그랬군요.”
“덕분에 저 녀석도 내내 저기압이야.”
라이넬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내 등에서 떨어졌다.
“.....”
말없이 뒤돌아보니, 라이넬은 평소보다는 약간 힘없이 웃고 있었다.
“뭐, 그래도 먼 길 가는 후임은 챙겨주는 걸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지만. 아무튼, 조심해서 갔다 와. 어찌됐든 여긴 타지고, 우린 이방인이니까. 특히 남자가 수작 건다고 홀라당 넘어가지 말고.”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아마도 평생 말이죠.

“어디 보자, 속옷은 다 말랐던가...? 좋아. 이 정도면 잘 말랐군.”
루크레티아 양과 동행하기 전, 개인 짐을 챙겼다. 있는 대로 구겨뒀던 탓에 구불구불한 휴가용 가방을 억지로 펼쳐, 옷과 권총, 몇몇 개인 용품들을 층층이 집어넣고 있자니, 문득 여태까지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엉겁결에 군복을 입고, 엉겁결에 아인의 흉내를 내다가, 엉겁결에 기차에 내던져진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런 희극과도 같은 이유로 시작된 이 연극은, 어느새 그 무대를 대륙 북단의 아틀리아 반도까지 넓히고 말았다.
“후우...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혹시, 일리야 중령이 가라고 했을 때 내 반응이 격하거나 하지 않아서, 갑자기 루크레티아 양을 따라가는 새로운 임무를 받은 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여긴 사람이 있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육군 장교인 아인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그 직후 일리야 중령이 나디아의 편지를 전해주는 바람에 내 신경이 분산되어 버린 탓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리라.
구체적으로, 새롭게 떨어진 개인 임무 때문에 곤란한 점은 세 개였다.
첫째는 낯선 사람과 함께 낯선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루크레티아 양은 과연 소대원들처럼 속일 수 있을까? 성격이 까다롭다거나, 의심이 많다거나 한 건 아닐까? 그녀에 대해서 아직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무척 조심해야만 할 것이었다.
둘째는 휴가가 미뤄진다는 것이었다. 일리야 중령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이번 전역만으로 전쟁이 끝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요새 진지에서의 전투 뒤 계속해서 휴가가 통제되던 상황은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틀리아 자유국에 발이 묶이면 휴가 계획이고 뭐고 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셋째는... 레미안이었다. 1주일 정도면 르제프에서 돌아온다고 했었는데. 이래서야 상당기간 완전히 떨어지게 생겼다. 그녀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나갈 수 있을까, 과연?
“아아. 진짜 곤란한데.”
정말로 자해라도 하면 어떨까? 아니, 안 된다. 혹시라도 들키면 아인의 평판이 급전직하 할 것이다. 들키지 않는다면? 치료를 핑계로 루크레티아 양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작은 부상이면 대대에 있는 전술마법사가 금방 치료해버려서 결국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큰 부상이면... 그럴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큰 부상을 입는다면 다른 사람 앞에서 옷을 벗어야 일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기각. 우와. 그러고 보니 나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뼈 부러뜨릴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무튼,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조심하는 것밖에는 없는 건가?

덧글

  • Arsita 2016/07/13 08:02 # 답글

    간만에 들러보니 올라왔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
  • Artz알츠Mari마리 2016/07/13 15:54 #

    감사합니다.
  • 샬롯 2016/07/18 23:12 # 답글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두 편이나 올라와 있었네요!
    잘보고 갑니다 ㅎㅎ
  • Artz알츠Mari마리 2016/07/19 00:20 #

    아직 찾아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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