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96) ㄴ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다음 날.

눈이 번쩍 뜨여서 일어나니, 비가 그쳤는지 창밖에서 햇빛이 비치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마다 느끼는 어지럼증 때문에 잠깐 더 눈을 감고 있다가,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싶을 때쯤 해서 기지개를 켜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0640시였다. 정신 차리는 데 10분쯤 걸린 건가? 잠들기 위해 편하게 풀어뒀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도 대충 묶은 다음, 머리맡에 뒀던 개인 군장을 챙겨 침대에서 내려섰다.
엘레노아와 루크레티아 양은 아직 자고 있었는데, 루크레티아 양은 민간인이라 그런지 잠자리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고 이불을 덮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다 그녀가 깨어나면 상황이 민망해질 수 있으니 차라리 불러서 깨워주는 편이 낫겠지.
“저기, 루크레티아 양?”
“으응...”
“소위님, 일어나셨어요?”
“엥?”
루크레티아 양을 깨우려고 불렀더니, 엉뚱하게 엘레노아가 내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으음. 역시 군 경력이 있다곤 해도 민간인인 사람과 현역 군인인 사람은 다른 걸까.
“아직 피곤하면 한 10분 더 있다가 일어나도 돼.”
“아뇨, 괜찮습니다.”
엘레노아가 약간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갈 길도 먼데 빨리 일어나야죠.”
“운전자가 졸면 안 되잖아.”
“괜찮다니까요.”
“흐음...”
강제로 다시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알았어. 음. 차량 점검 도울 거 있어?”
“저기, 특수 차량도 아니고, 아침에 하는 점검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그럼 주인 할머니가 아침 준비하시는 데에나 함께 할까?

“아이고, 들어가 더 쉬소! 그저 젊은 처자들은 자야 하오. 그렇잖으면 빨리 늙소.”
“...에, 그, 그게, 하지만...”
“가소, 가소... 어서, 어서.”
아마도 나보다 일찍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주인 할머니는 나를 다시 방으로 밀어 넣으신다. 저런 자그마한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시는 걸까?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난 뒤, 나는 결국 일찍 일어난 보람도 없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어두운 방 안에는 루크레티아 양만이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어쩌지.”
제일 먼저 기운 넘치게 일어났건만, 할 일이 없다니.
결국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엘레노아가 누워 있던 침대로 가서 털썩 앉을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침대 위에 있는 루크레티아 양의 흐트러진 모습 때문에 눈 둘 곳이 곤란하기 때문에, 썩 편하지는 않았다.
“으음.”
“힉...”
애매하게 있던 차에, 루크레티아 양이 갑자기 일어날 것 같이 몸을 뒤척였다. 민망한 광경을 보게 될까 두려워 급히 침대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하다가, 그녀가 뒤척이기만 하고 그대로 다시 잠들어서 다시 일어났다.
“......”
애매하게 앉아 있다가, 엘레노아도 이미 일어나 있는데 명색이 장교면서 다시 잘 수도 없고 하니 짐이라도 정리해 두자 싶었다. 침대 2층에 있는 가방을 하나씩 끌어내렸다. 차에 뒀다가 도둑이라도 맞으면 곤란해서 방으로 다 옮겼는데, 양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읏챠.”
“으음... 아인 소위님? 뭐 하세요?”
“네?! 어, 으어!!”
-쿵 - 털썩!
좀 안쪽에 있는 엘레노아의 가방을 끌어내리려고 손을 뻗는 찰나, 뒤쪽에서 갑자기 루크레티아 양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깜짝 놀란 나는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침대에 붙은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허우적대다가 뒤로 넘어졌다. 뒤통수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닿는 느낌이 난 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괜찮으세요?”
맙소사. 무릎에 누워 있는데 얼굴이 안 보이다니...가 아니라.
“괘, 괘, 괜찮습니다!!”
황급히, 아니, 조심해서 일어났지만, 민망해서 눈을 맞추질 못하겠다.
“지, 짐을 좀 정리하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으음. 깨우지 그러셨어요. 저랑 같이 하면 됐을 텐데.”
“아니, 평화롭게 주무시기에요.”
“흐음... 저기, 아인 소위님? 저는...”
“네?”
“아니, 아니에요. 일단 옷부터 제대로 입고 아침식사 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전 아인 소위나 엘레노아의 상전으로서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아침 식탁에서 루크레티아 양은 그렇게 말했다.
“어디까지나 외무성 소속의 일개 공무원으로서, 다른 조직인 육군에 소속된 아인 소위에게 업무상의 협조를 구할 뿐인 거죠. 그러니까 딱히 힘든 일이라고 해서 저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둘 생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손발 다 멀쩡하게 붙어 있으니까요. 덤으로 힘은 두 사람보다 더 셀 걸요?”
힘이 더 세다고? 엘레노아와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루크레티아 양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설명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는 걸까.
“네.”
“엘레노아도, 알았죠?”
“알겠습니다.”
그냥 피곤한 사람 더 자게 두려고 했을 뿐인데 설교를 들어버렸다. 억울해...
“자, 그럼 아침을 먹도록 하죠. 제노바에 가서 할 일이 많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루크레티아 양은 웃으면서 단출한 아침을 들기 시작했다.

그 뒤의 여정은 별 것 없었다. 비가 온 직후라 포장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도로가 질퍽거렸기 때문에, 차가 빠르게 달리기에 적합지 않아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오후 세 시 경에는 멀리 제노바 시내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엘레노아가 졸리다며 뭔가 노래를 부르고, 나와 루크레티아도 멍하게 있다가 같이 따라 부르는 것 같은 소소한 일들이 있긴 했지만, 넘어가자.(?)
“저, 이대로 시내로 들어가나요?”
엘레노아가 묻자, 루크레티아 양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펠리스 가문 저택은 시 외곽에 있다고 했어요. 잠깐 지도 좀 보고요.”
“지도책에 개인 집이 나와 있는 건가요?”
“100년 가까이 된 고택 쯤 되면...아, 여기 있네요. 아인 소위, 저랑 자리 좀 바꿔 앉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갔다.
“엘레노아, 제가 가라는 대로 가면 될 거에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의 뒷좌석에 앉아 생각했다. 100년 가까이라니,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공화국보다 더 오래된 집이란 이야기다. 줄리오 펠리스 중위가 그런 유서 깊은 집안의 사람일 거라곤 함께 행동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럼 군 계급을 제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공자(公子)님? 아아, 뭔가 더 대단하게 느껴져서 내가 괜히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만 더 강해진다.
루크레티아 양도 참 그렇다. 그저 같이 한 번 움직였을 뿐이고, 본인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신문기자에게 칭찬 한 마디 했을 뿐인 내가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고 불러선. 차라리 루크레티아 양 자신이야 신분이 외무성 소속이고 하니 중요한 손님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아니 아인은 일개 소위다. 잡일꾼 A 이상도 이하도 아닐 가능성이...
“저기, 저 언덕 쪽에 커다란 담벼락... 아닐까요?”
“맞는 것 같네요. 엘레노아, 저 집 정문으로 가죠.”
“그야말로 언덕 위의 하얀 집이네요.”
혼자서 자괴감에 빠져 있던 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다음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와...”
마리아가 살던 렘하트 저택은 시내 한가운데 있어서, 좀 큰 집이라는 인상을 줄 뿐 그렇게 특이한 건 아니었는데, 이 집은 번잡한 항구도시 외곽에 홀로 고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차로 가까이 갈수록, 덩굴에 덮인 오래된 담벼락이니, 장갑차 두 대가 붙어서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정문이니 하는 것들이 하나씩 눈에 보인다. 저택은 2층 집이었지만, 좌우로 넓어서 방이 몇 칸이나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저 집 유지비가...”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으음. 저런 멋진 집을 보고도 대뜸 유지비 생각부터 나다니. 내 정서란 얼마나 메마른 걸까?

정문 앞에 가니, 단정하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와 뭐라고 정중한 태도로 이쪽에 말을 걸었다. 그러자 루크레티아 양이 앞에 나서서 유창한 아틀리아 어로 대답하며 어떤 서류를 펼쳐 보였다. 서류를 받아든 그 할아버지는 외눈 돋보기를 꺼내 끼고선 그 서류를 세세히 살피고, 다음으로 엘레노아와 나를 바라보더니 뭐라고 말하며 저택 대문을 활짝 열었다.
“엘레노아, 들어가요.”
“어, 된 건가요?”
루크레티아 양은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신분은 믿어주시는 것 같네요. 줄리오 중위는 현재 출타 중이라 집 안에 마음대로 들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안쪽 차고에 차를 두고 기다릴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하네요.”
으음. 차고라.
“환대받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제1 해안파에 속한 지역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공화국에 그렇게 우호적이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 데면데면하다? 그런데 그런 공화국의 공무원들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자신이 모시는 집안의 사람을 찾아온 거니까, 도대체 무엇을 하러 온 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그래도 최소한 집 밖에 기다리라고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
“눈치라면?”
“제노바에는 연합왕국의 종합상사 지부가 몇 개 있어요. 그 사람들은 물론 기본적으론 장사꾼이지만, 연합왕국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니까요.”
저 도시에 정탐꾼이 있다는 건가?
“사실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고 적은 인원으로 이 집을 찾아온 건 그런 이유도 있어요. 처음부터 불필요한 주목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 이유였나. 과연, 나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이유로, 가급적 빨리 줄리오 펠리스 씨를 통해서 제1 해안파의 향후 외교, 특히 국방에 대한 비전을 파악한 뒤 브루노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에요.”
흐음. 줄리오 중위가 그걸 또 사실대로 이야기해주느냐는 별개의 문제 같지만, 그건 결국 루크레티아 양에게 달린 문제인 것일 테니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니겠지.

결국 우리는 한동안 저택 화단가에 나란히 앉아서 남자 하나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미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한 다음이라, 별로 그럴 생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무척 조용했다. 저택의 몇몇 고용인들이 이따금 오가며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무슨 동물원의 사슴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우...”
계속 앉아 있으려니 허리가 뻐근해져서, 잠깐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별 생각도 없이 저택의 2층을 멍하니 보며 기지개를 켜고 있자니, 창문 건너로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지 커튼의 가운뎃부분이 슬쩍 들쳐져 있었다. 내가 그곳을 빤히 바라보자, ‘누군가’가 커튼에서 손을 뗐는지 그 조그마한 틈은 금방 사라졌다.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큰 집에 사람이 한둘이랴. 궁금해해봤자 소용없다 싶어 이내 생각을 접고 멍하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쬐고 있자니, 공화국에서 하던 것처럼 일광욕이나 하면 좋겠다싶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고, 남의 집이니 안 될 말이겠지. 햇볕에 딱딱하게 마를 군복의 감촉을 즐기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 고작이다.
“히힝!!”
그렇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어느 순간 말 울음소리와 함께 줄리오 중위가 돌아왔다. 우리를 정문에서 맞이했던 할아버지가 문을 열며 줄리오 중위에게 인사하고, 우리 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줄리오 중위는 곧 익숙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린 다음, 말고삐를 할아버지에게 건넨 뒤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아인 소위, 그리고...아, 이 집에선 그렇게 격식을 차리진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상대가 상급자라는 게 문득 생각나서 급히 경례를 붙이자, 줄리오 중위는 그렇게 말하곤 내 곁에 서 있는 두 사람 쪽을 살짝 바라보며 소개를 부탁하는 눈짓을 했다.
“아, 네... 그, 이쪽은 루크레티아 폰 디제 양입니다. 공화국 외무성 소속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와 함께 온 엘레노아 필비 일병입니다.”
일단 소개를 하고 나자, 루크레티아 양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아틀리아 어로 공손하게 인사하면서 다시 자기소개를 했다. 아니... 자기소개치고는 좀 긴 것으로 봐서 방문한 용건까지 말하고 있는 건지도. 그러자 줄리오 중위도 살짝 웃으면서 뭐라고 대답한 다음, 나를 배려해서인지 다시 공화국 공용어로 말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가시죠. 저도 막 돌아온 참이니 좀 준비를 한 다음에 오신 용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요.”
“네, 감사합니다.”
“조넬러스!”
아까의 할아버지가 아닌, 젊은 남자아이(?) - 얼굴만으로 나이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 가 뭐라고 대답하면서 달려 나왔다. 줄리오 중위가 그에게 짧게 몇 마디를 하자, 그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며, 앞장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와 달라는군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럴 줄 알았는지 어느 틈에 가방에서 다른 신발을 하나 꺼내서 갈아 신었던 루크레티아 양은 빼고, 나와 엘레노아는... 어제 비가 올 때 진흙탕을 밟은 군홧발 그대로라 현관 밖에서 잠깐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해야만 했다. 이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여자 몇 명이 나와 엘레노아가 그러는 것을 보며 쿡 웃으면서 지나갔다. 둘러싸고 구경하진 않는 것을 고마워해야 하나.
“뭘 하면 이렇게 돈을 벌 수 있을까요?”
그렇게 흙을 떨어내고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로 향하던 중,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집안의 장식들을 보면서 엘레노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항구도시에서 잘 사는 방법이라면 어업이나 무역이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말이지.”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전역하고 나면 니케랑 같이 운수업계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이 집을 보니 결심이 흔들리네요. 쩝.”
운수업계라. 철도 사정이 나쁜 공화국에서 인력 소요가 큰 분야 중 하나다. 도로를 중심으로 짜인 물류망은 공화국의 도시들을 잇고, 먹여 살렸으며, 아우토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엘레노아는 나중에는 니케와 동업이라도 할 생각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이 전쟁이 끝난 뒤의 일이 되겠지만.
“집이 크면 청소할 곳도 많잖아? 세금도 많이 내야 되고.”
“소위님 야망이 없으시네요.”
“그래?”
“그런 말도 있잖아요? ‘소녀여, 야망을 품어라!’고.”
“북부주 교육 운동가 라스카리아였던가?”
“네.”
성은 알려져 있지 않고, 라스카리아라는 이름만으로 알려진 그녀는, 스스로가 무력을 통한 독립 운동에는 재능이 없다며 밤중에 몰래 여자아이들에게 야학을 하러 돌아다니곤 했다는 교육자였다. 기실 그녀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문자 정도로, 아타만 식민 통치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리야 중령이 받았던 독립군계 야학처럼 군사 교련이나 역사 교육을 포함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실적에 목말라있던 아타만 치안 당국은 그녀를 붙잡아(독립군계 야학을 뒤쫓다가 이따금 쥐도 새도 모르게 순직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혼자서 돌아다닌 라스카리아는 얼마나 만만했겠는가?)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형시켰다.
라스니아 공화국, 에쉬르 제국, 연합왕국 식민 당국의 관리들조차 실소를 금치 못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글줄이나 가르친 자그마한 여성에게 징역이나 살리면 될 것을 잔혹한 고문 끝에 공개적으로 목을 매달다니. ...뭐, 그렇게 공개적으로 목을 매달렸기 때문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외친 한마디는 남게 되었지만.
아무튼, 지금 그 이야기가 중요한 건 아니고...
“야망은 하늘에, 지갑은 내 곁에.”
“어, 아인 소위님이 만든 말이에요?”
“응. 라스카리아도 동의할 거라고 확신해.”
“적어 둬야겠다...”
“엑...뭐하러?”
“써먹어야죠.”
엘레노아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수첩을 하나 꺼내 연필로 내가 한 말을 적었다. 앞에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레티아 양도 다 듣고 있었군. ...민망해라.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한 조넬러스라는 남자아이(?)는 잠시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그렇게 말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지만 -에, 소파 앞에 개인용으로 하나씩 놓인 자그마한 탁자에 차와 비스킷을 내놓고 사라졌다. 응접실은 연합왕국풍이 좀 섞인 듯 매우 고풍스러워서, 어쩐지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딱딱한 군복의 감촉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움츠러든 채로 앉아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나나 엘레노아가 그렇게 긴장하고 앉아 있는 반면, 루크레티아 양은 정말 자기 집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어울리는 자세로 품위 있게 앉아 있었다.
“아틀리아 반도는 연합왕국처럼 딱딱한 곳은 아니에요. 그렇게 두 사람이 긴장해 있으면 줄리오 중위가 오히려 불편해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엘레노아와 마주보며 조금 자세를 편하게 풀려던 찰나-
-끼이익-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는 다시 자세를 굳혔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 사이에 옷을 갈아입었는지, 평상복 차림의 줄리오 중위가 나타났다. 여전히 나나 엘레노아를 배려해서인지, 유창한 공화국 공용어를 쓰고 있었다.
“아뇨. 저희야말로 미리 연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이번 방문의 주요 목적은 루크레티아 양에게 달려 있었지만, 일단 이 방문 자체가 나를 매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선 내가 사과의 말을 하는 게 당연하겠다 싶어 그렇게 사과하니, 줄리오 중위는 지난번과 같이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인 소위는 우리 부중대장을 위해 목숨을 걸려고 했고, 또 그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이 엉뚱한 짓을 벌이는 멍에를 뒤집어 써준 사람입니다. 언제 찾아와도 환영입니다.”
“네, 네에...”
멋쩍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러고 보니 줄리오 중위는 일리야 중령이 말하는 도중, 다른 대대 장교들 앞에서 내가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알데인을 끌고 나간 이유를 알고 있는 눈치였었지... 그래도 그걸 이렇게 대놓고 앞에서 말하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루크레티아 양이나 엘레노아도 별 말은 없었지만 내 쪽을 슬쩍슬쩍 쳐다보는 것이, 그런 일도 있었나 하며 놀라는 눈치였고.
“그리고 그녀와 함께 왔다면 다른 분들도 제게는 손님입니다. 찾아오신 이유야 어떻든,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되도록 편하게 있어 주십시오.”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루크레티아 양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줄리오 중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침 저도 미테란트 분들에게 듣고 싶었던 것이 있었고 말이지요.”
“그건 무척 잘 된 일이네요.”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빛나는 것 같았다.

...나,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 걸까?

조넬러스라는 남자가 몇 가지 다과를 더 가져다 놓고 나간 뒤, 줄리오 중위는 약간 편한 자세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앉아 말을 꺼냈다.
“굳이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그 신문 기사 때문입니까?”
루크레티아 양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브루노에서...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들은 이야기가 있었답니다. 그게 제 발길을 이곳으로 이끈 이유라고 말하는 게 타당할 것 같네요.”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지 궁금하군요. 대충 짐작이 가는 데는 있지만...”
“네. 수도에서 ‘J 리포트’라는 이름으로, 일부 의원님들 사이에 향후 아틀리아 자유국의 외교 및 국방 방침에 대한 구상이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지금의 지방방위군 집합체인 국경수비대에는 경비 및 치안 업무만 남기도록 하고, 현대적 참모본부에 의해 지휘를 받는 연방군, 혹은 중앙군의 창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하지만 그런 주장은 국경수비대 내부에서도 여러 차례 제기되었던 것의 재탕일 뿐입니다만. 미테란트에서도 모를 리가 없고 말이죠.”
“주장이야 여러 번 제기되었지만, 매번 파묻혔죠.”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고, 다들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동안 신경도 쓰고 있지 않다가 대뜸 눈에 띄는 리포트를 발견한 것 같더군요. 마침 그 리포트 앞면에는 어떤 계기로 인해 상당한 비중을 갖게 된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다고 하고요. 그래서 제 상관이 약간의 수소문을 한 끝에, 줄리오 중위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누군가 입이 싼 사람이 있었다는 걸까? 줄리오 중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처음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돌려서 물어볼 이유가 없겠군요. 생각하신 대로, 혹은 들으신 대로. 그 J는 저를 말할 겁니다. 그리고 ‘J 리포트’는 2여단의 ‘연구회’에서 제 이름으로 쓴, 일종의 미래구상의 서론 부분이고요.”
“역시 본론과 결론이 있었군요. 그 내용을 좀 들을 수 없을까요?”
줄리오 중위는 고개를 저었다. 거절일까?
“보여드리는 건 무리라도 내용을 말씀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본론과 결론 부분은 몇 년 전에 작성됐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참가한 것이고, 나름 진지하게 작성되고 있었던 만큼 내용을 계속 다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덤으로 이번 전쟁의 결과와 전훈을 반영해야 할 테니, 또 고쳐야 할 곳이 잔뜩 나오겠지요. 아마 몇 년 이래 가장 큰 폭의 수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기존 내용은 말씀드려봤자 시간 낭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쟁의 결과라면 대륙에서의 아타만 세력 완전 축출, 그리고 20여 년 전에 아틀리아 자유국이 잃었던 남쪽과 동쪽 영토의 회복을 말한다고 봐야겠지? 그걸로 아틀리아 자유국을 둘러싼 환경, 그리고 국경경비대를 둘러싼 환경은 각각 상당히 크게 변했을 테니까.
“그 본론과 결론 부분은 이 지역 정가에서 어느 정도로 알려져 있는 건가요?”
“제노바 대표 의원 2명 중 1명인 제 숙부님 같은 분이나, ‘연구회’에 소속된 사람과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라면 구해다 보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본론과 결론 부분은 순전히 군사상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라 그분들의 세세한 흥미를 끌만한 내용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랬군요.”
“숙부님도 그렇지만, 제노바의 엘리트층은 대부분 상업이나 법률을 중심으로 기반을 다진 사람들입니다.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쪽은, 루크레티아 양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산악파’에 속한 분들입니다.”
“.....”
거기까지 말한 줄리오 중위는 갑자기 루크레티아 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루크레티아 양은 그런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왜 그러시냐는 듯한 표정을 웃으며 지었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줄리오 중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산악파, 아니, 사실상 그곳을 주도하는 분인 비토리오 베르디 의원께선 나름대로 독자적 구상을 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행간이 많이 생략된 것 같았지만, 이건 명백히 그 ‘산악파’에서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고 떠보는 질문이다 싶었다. 아까 루크레티아 양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것도 이 건에 대해서 뭔가 할 말 없었냐는 거였겠군.
“...공식적으로는, 중앙 정부 기관인 외무성 외에 아직 어느 당파에서도 선발 파견된 대표부에 대한 접촉 요청을 해온 쪽은 없답니다. 다만 산악파 의원들 쪽에서 매우 환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브루노의 언론에 실렸을 뿐이죠.”
으음. 하지만 아까 ‘J 리포트’를 쓴 사람에 대해 알아보러 다녔다는 건? ...그렇군. 비공식이군. 루크레티아 양이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듣는 쪽에서 뜻을 알아들을 거라고 여기고 있다는 건가.
“흠. 어쨌든, 늦든, 혹은 ‘매우 일렀든’ 간에 비토리오 베르디 의원님의 ‘구상’을 들으실 기회가 있겠군요.”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루크레티아 양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목소리를 살짝 가다듬고 줄리오 중위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듣지 못한 목소리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답니다. 대표부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구상을 말씀하고자 하는 분들 이외의... 다른 분들에게 말이죠. 공화국이 그저 이야기하기에 익숙한 상대가 아니라서 조심스럽게 속으로만 품고 있는 구상 같은 건 없을까...하고요. 더구나 그 숨겨진 목소리가 이 나라의 절반의 목소리라고 한다면, 그걸 알지 못하고 성급한 관계를 성립해 이웃 나라로 살아간다는 건, 서로에게 불행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줄리오 중위가 어깨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가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왜 여기로, 왜 제게 오셨습니까? 힘없고 가난한 조직인 국경경비대의, 거기다 일개 중위인 제게서 듣는 목소리라고 하는 것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그동안 관심을 가지던 것이 무역뿐이던 제1 해안파 의원 분들께서 ‘우리 지역에도 국방과 관련한 구상을 나름 구체적으로 미리 마련해둔 사람이 있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모습을 본다면... 외부 사람들이 J 리포트라는 것이 혹시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아니면 그 작성자의 생각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루크레티아 양은 나름 명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줄리오 중위는 고개를 저으며, 보기 드물게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게는 부담스러운 관심이군요. 숙부님을 비롯한 이곳 북부 지역 정치인 분들이나 상공계 분들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당장 전역한 뒤 정치 일선에 서달라는 말을 하시지를 않나, 윗선인 내무부에서는 사태가 이러니 일단 고향에 가서 잠시 쉬다 오라고 하며 부하들에게서 떼어놓지를 않나, 그리고 기어코 미테란트 공화국에서까지 절 찾아 오셔선 젊은 장교들의 어설픈 구상의 내용을 물으시지를 않나... 한 달 전의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누가 말해줬다면, 코웃음을 치며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쏘아줬을 겁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줄리오 중위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 중 상당수가 내가 별 생각을 하지 않고 기자에게 대답을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줄리오 중위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짜증을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아, 이게 웬 민폐인 걸까, 나라는 인간은...
“루크레티아 양? 저는 일단 군인이라, 외무성 분이 그렇게 멀리 돌아가며 일 이야기를 하자 하시는 것에는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정 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좀 더... ‘실용적으로’ 대화를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줄리오 중위가 결심한 듯 그렇게 묻자, 루크레티아 양은 잠깐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내내 얼굴을 떠나지 않던 미소를 거짓말같이 걷었다.

줄리오 중위가 밝힌 ‘J 리포트’의 내용은 정말로 별 것 없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J 리포트 자체는 지난 수십 년간 제기되었던 이야기를 반복했을 뿐인 간단한 내용입니다. 아틀리아가 기존의 중립 정책을 고수한다는 가정 하에서, 향후 군사력 건설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를 구상한 내용이었습니다. 군의 기계화를 위한 차대 개발과 같은 몇몇 부분에서는 지난 몇 년 사이 실제 진척도 좀 있었고요.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 외의 큰 부분들은, 그 기본 전제이던 아틀리아 자치령과 아타만 회랑이 사라짐으로 인해 변화가 불가피해졌습니다.”
루크레티아 양이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어디서도 의견 정리가 되지 않았다고 봐도 될까요?”
“그렇게 보셔도 무방할 겁니다. 사실 각 지방의 의원들이 브루노에서 모여 싸우고 있는 게 그 이유 때문이니까요.”
“줄리오 씨를 향한 정계 진출 압박은...?”
줄리오 중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J 리포트’라는 것이 쓸만하게 완성된 구상이었다면 숙부님에게 건네 드리고 그걸로 싸우시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국토 수복이 되었고, 저와 함께 그걸 작성했던 사람들은 다 구 자치령 지역에 가서 치안 유지 활동 중이지요.
그에 비해 의견이 다른, 소위 ‘산악파’ 쪽에선 매우 일관된 국방, 아니, 국방에 한정되지 않았다고 봐야 하겠군요. 국가 개조 구상을 꾸준히 내놓았었습니다. 그동안은 그냥 늙은 정치인의 허황된 구상일 뿐이라며 다들 무시했습니다만, 모두가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된 이런 시기에는 그동안 꾸준히 그런 생각이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온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숙부님과 그 동료 분들은 당황하고 계시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악파’ 쪽의 구상은 J 리포트 같은 것과는 방향성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건 ‘제1 해안파’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안입니다. 그래서 그 노정객, 비토리오 베르디 씨에게 맞서 싸울 얼굴마담이 필요하게 된 거죠.”
산악파라면 루크레티아 씨가 친 미테란트 성향이 강한 중부 지역의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고 말해줬던 곳이다. 그곳의 지도층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까?
“더 말씀드리기 전에, 저도 미테란트에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좀 알고 싶군요. 간략하게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루크레티아 양은 살짝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이번 전역의 결과로 공화국과 아틀리아 자유국은 수십 년 만에 국경을 다시 맞대게 되었습니다. 그건 양국 모두에게 있어 전략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죠. 덤으로, 앞으로 어찌될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고요. 불확실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공화국 상층부에서는 아틀리아 자유국 내부의 정치세력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것은 각각의 지방에서 근처 강대국들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는지 아니면 반감을 느끼는지 하는 정도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하고 목소리가 큰 지역인 북부 지방의 정치인들 사이에선 친 연합왕국 정서가 지배적이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걱정할 만하군요.”
“그렇죠. 만약, 아틀리아 자유국이 새로운 국경의 안정을 위해, 근처의 육군 강국인 우리 공화국을 경계하면서 연합왕국과 군사동맹을 맺는다면 어떨까요? 공화국 입장에서는 기존에 아타만 회랑과 자치령을 통해 아타만 육군과 마주하던 기존의 다소 짜증나는 환경이 아틀리아 반도 전체를 통해 연합왕국의 군사력과 마주하게 되는, 그야말로 위협적인 환경으로 변화하게 되는 격입니다.”
루크레티아 양은 현명하게 그 뒤의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고? 공화국은 그런 환경 변화를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아마도 생략된 뒷말의 내용을 모르지 않을 줄리오 중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미묘하게 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당신이 말하는 제1 해안파 내부에서는 그런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긴 전통적으로 통상 교역을 통해 연합왕국에게 정서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 많았습니다. 또 그런 연합왕국과 동맹을 맺어 보호를 받는다면 아타만 제국이나 남쪽의 육군 강국인 미테란트로부터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유감스러운 현상이로군요.”
“하지만,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태반은 기실 침략자인 아타만 제국은 몰라도 미테란트 공화국에 대한 악감정은 없습니다. 따라서 연합왕국과의 군사 동맹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심드렁한 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사실 그동안 중립국으로 무난하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럴 뿐만 아니라,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입니다만... 기술적인 문제로서 지상군이 소규모인 연합왕국과의 동맹이란 것이 생각하는 만큼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오히려 연합왕국이 장차 미테란트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다면, 아틀리아 반도를 통해 어설프게 지상군을 투사하려 들 때 공세지향적인 귀국 군대는 국경 너머에서, 즉 우리 영내에서 요격하려 들겠지요. 그렇게 되면 설령 막아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남부지방에서 이번 전역보다 심한 피해가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이기는 것이야 군인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사실은 이길 일조차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죠.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편이 몇 배는 더 낫습니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갖춰졌다 싶었는지, 줄리오 중위는 작심한 듯 솔직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와 엘레노아는 자연스럽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하지만 루크레티아 양은 그런 분위기에도 별로 긴장하지 않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듯 물었다.
“동맹으로 인해 얻을 억지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적어도 남쪽에 뜬 섬나라인 연합왕국에 있어서는 북쪽 지중해의 아틀리아 반도가 그런 식으로 이용을 거부하도록 해서 지켜나갈 만큼의 가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물론, 아틀리아 반도가 귀국의 남해안 쪽에 붙어 있었거나, 연합왕국이 아타만 제국 자리에 있었다면, 혹은 귀국의 지중해 함대가 연합왕국이 경계할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가졌었다면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겠지요.”
맞다. 공화국 해군이 강력하다면, 아틀리아 반도의 항구를 이용하게 됨으로써 연합왕국의 제해권에 도전하기 용이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해군은 그 정도로 강력하진 못하다.
“지중해에는 비행장과 항구, 기지를 갖춘 괜찮은 섬도 몇 개 있고 말이죠.”
“네, 바로 그겁니다. 연합왕국에게는 굳이 아틀리아 반도에서 육군 강국인 미테란트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절실한 이유는 없습니다. 어쨌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연합왕국과의 공수동맹은 아틀리아에 있어 얻는 것에 비해 너무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줄리오 씨 당신은 미테란트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것도 힘들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아틀리아 반도 전체의 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반도 북부 도시들의 무역이 연합왕국과 아타만이라는 양대 해양 강국에 의해 손쉽게 막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맞다. 덤으로 우리 공화국은 아직 지중해에서 그런 해상 봉쇄를 뚫을 능력이 없다. 그리고 줄리오 중위는 어쨌거나 이곳 제노바 출신이다. 이곳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따라서 강력한, 가능하면 욕심이 없는 적당한 후견국을 하나 가진 중립국가로 있는 편이 가장 양호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역의 결과로 봤을 때에 그 적당한 후견국은 아마도 귀국, 그러니까 미테란트 공화국일 겁니다. 그래서 요즘 숙부님이나 다른 분들과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고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건...”

줄리오 중위가 중립을 위한 후견국(동맹국이 아닌!)으로 우리 공화국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세 가지 이유는 이런 것들이었다.
첫째, 현재 대륙 중부를 둘러싼 국제적 긴장 상태로 볼 때에 아틀리아 반도를 평화 상태로 유지하는 것으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주변 국가가 우리 공화국이라는 점이었다. 양면을 넘어서 사면 전쟁의 가능성이 있는 나라에서 한쪽 방면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둘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으니까.
둘째, 아틀리아 자유국 입장에서 볼 때는, 유사시 일이 벌어진다면 남쪽에서 육로로 수적, 질적으로 압도적 병력을 가지고 들이칠 공화국 군대를 바다를 건너와야 할 연합왕국 군대를 믿고 막아서는 것보다는 해안에서 상륙해야 할 연합왕국 군대를 우리 공화국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며 막아서는 것이 ‘그나마’ 쉽다는 점이었다. 어느 쪽이든 아틀리아 자유국 자신에게 장차전의 승리를 이끌어낼 힘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적어도 국토의 보다 작은 부분만이 전화를 겪는 편이 그나마 낫다는 냉정한 계산도 있었다.
셋째, 얼마 전 우리 공화국에서 아틀리아 자유국 군사력 재건을 돕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소식은 나도 전역이 끝나고 야외에서 주둔하던 때에 전해진 공보를 보고 알고 있었는데, 약간의 기갑장비나 중포, 항공기, 해안포, 방공포 등 대형 장비부터 기관총 같은 의외로 제대로 만들기 힘든 공용화기까지 다양한 품목이 검토되고 있다고 했다. 반면 연합왕국의 경우 아타만 제국과의 가까운 관계 때문에, 아틀리아 자유국 군비 문제로 자신의 국고를 과감하게 열 생각이 없었다. 아틀리아 자유국 정부 입장에서는, 돈 먹는 하마인 군사력의 확대 개편이 중앙 정계에서 논의되는 이 때에 까다로운 조건 없이 돈과 장비를 지원한다는 쪽을 택하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아틀리아 자유국이 공화국을 후견국으로 택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익이었다.
한편, 중립을 지키면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여러 가지 있었다.
첫째는 아까도 말한 북부 지역의 해양 무역에 타격이 가해질 염려가 적다는 것이었다. 아틀리아 자유국의 무역량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항구를 통해 공업국들의 공산품들이나 이런 저런 현대 사회의 필수적 소모품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젖줄 중 하나였다.
둘째는 인구의 상당부분이 종사하고 있는 농업 부문에 있어, 남쪽에 새로이 거대한 수요처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값을 짜게 쳐주던 아타만 제국을 상대로 농산물을 팔아야만 했던 아틀리아의 농업은, 국경을 맞댄 공화국과 적대를 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특히 이번에 되찾은 구 아틀리아 자치령 지역 및 회랑 지역의 농업과 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 예상되는 터였다.

공화국 입장에서도 손해를 보는 조치가 결코 아니었다. 아틀리아 자유국에, 가뜩이나 귀중한 병력을 점령군, 혹은 동맹을 위한 방어군으로 묶어둘 필요가 없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로는 충분했다.
육군은 말할 것도 없고, 루크레티아 양이 일하는 외무성의 사람들도 당연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불균형한 농업 구조로 인한 일부 작물의 고질적인 부족을 농업국인 아틀리아와의 육상 무역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식량 사정에도 도움이 된다.
내 입장에서는... 줄리오 중위의 구상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틀리아 반도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어 우리 군대가 다시 이 땅을 밟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나라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내 차에서 쏜 총탄에 맞은 그 아이가 다시 전쟁을 보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일리야 중령의 ‘선생님’이 평온한 여생을 보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내게 빵을 줬던 아이, 레....................................................다.
전쟁에 휘말린 테모르필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알데인이 다시 울 일이 없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차가운 이야기들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느낀 점은 그런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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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정도까지 개인 사정으로 집을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중단이네요.;;

덧글

  • Arsita 2016/08/21 20:02 # 답글

    근 세달은 못본다는 걸까요.... 아쉽네요
  • Artz알츠Mari마리 2016/08/21 21:26 #

    작성 작업이 불가능한 곳에 와 있어서요.-_-
  • 화데넷유저 아무개 2016/08/24 22:35 # 삭제 답글

    존경하는 그라프님... 혹시 메일 주소를 제가 드린다면 화데넷 지정 업로드로 블로그상에선
    자체검열하신 회차들을 제공해주시는 일이 가능할까요

    화데넷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블로그상의 내용만으로 대체하기엔 검열하신
    회차들이 너무나 내용상 중요도가 높아서
    상실감을 견디기 힘든 나머지 이런 간청을 올려요.. ㅠㅠ
  • Artz알츠Mari마리 2016/08/24 23:14 #

    안녕하세요.-_-;

    유감스럽게도 제가 지금 모처에 연수를 온 상태입니다. PC 사용불가라 팬픽 관련 작업이나 편집을 해서 보내드리는 일을 할 형편이 못 됩니다. 죄송합니다.-_-;
  • 마아가림 2016/09/12 00:52 # 답글

    헛 너무 오랜만에 봤네용
  • Artz알츠Mari마리 2016/09/13 02:16 #

    모처럼 재개했는데 참 계속 쓰기 힘드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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