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99) ㄴ소년은 누나를 사랑한다

“하으...으으...!!”
시체 둘, 벽에 꽂혀 신음하고 있는 여자 하나. 어쩐지 아인과 내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던 그 ‘녀석’이 휩쓸고 지나간 방에 남은 살풍경한 광경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깐 멍하게 서있던 나는 뺨을 살짝 두들긴 다음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목이 꺾여 죽은 두 남자의 얼굴을 되도록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품을 뒤져보니, 내 권총과 장교 수첩이 나왔다.
“찾았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의, 아니 아인의 소지품을 챙긴 뒤, 녀석들의 품을 더 뒤져봤지만 이런 쪽으로 조심성이 있었던 건지 약간의 돈이 든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는 지갑만이 나오고, 그 외에 신분을 짐작할 만한 물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는 죽은 남자가 떨어뜨린 권총을 들어봤더니 아틀리아 어가 음각되어 있었다. 현지에서 조달한 물품인 건가? 하긴 이런 정도의 일에 자기 나라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총이야 쏴서 맞고, 맞아서 다치거나 죽으면 그만인 물건인데 뭐하러 정체를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나라 총을 고집하겠는가.
어쨌든, 더 이상의 단서를 찾는 것도 지금의 내 수준에선 힘들 것 같았기에, 일단 몸을 일으켰다.
“......”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아타만 군의 시체를 볼 때와 달리, 이번에는 처참하게 쓰러진 시신들을 봐도 별로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당장 나 자신이 지상에서 ‘익사의 공포’를 느낀 다음이 되어 놓으니, 도리어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려고 할 정도였다. 인과응보라는 게 있긴 있구나 하면서.
“사, 살려줘...”
남은 사람에 대한 생각은 이제부터 정리를 해봐야겠지만.
“내게 그런 짓을 해놓고, 자신은 살고 싶은 거야?”
‘벨’은 자신의 손을 찌른 칼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불편한 자세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서는 희미하게 연기가... 연기?
“뭐, 뭐지?”
일반적인 사람 몸에 날붙이를 갖다 댄다고 해서 연기 따위는 나지 않는다. 아니, 물과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금속으로 만든 칼이라면 저렇게 연기가 날지도 모르지만.
“제발, 제발!! 이대로는!!”
그래, 아까 그녀가 외친 말이 생각났다. 라인메탈. 이 칼은 라인메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 시대, 지금과는 달리 ‘인류’의 한 갈래로 인정받지 못했던 몇몇 부족들은 점점 강력해진 농경 민족들의 군대가 든 라인메탈 무기로 토벌을 당했다. 그런 몇몇 부족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하나가 가졌던 특징은... 체구에 비해 이상하게 강한 힘, 차가운 피부, 라인메탈과 같은 특정 금속에 반응을 보이는 혈액. 그 원인은 여전히 과학적으로 규명되지는 못했다.
결론은 대충 알 것 같았다.
“너... 밤피르?”
내 물음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상기된 얼굴. 낮은 체온을 가졌다는 밤피르도 이런 얼굴이 될 수 있는 걸까?
“제...발...”
“......”
-팍-!!
“아아악-!!”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관통한 칼을 뽑았다.
“크으으...!!”
그녀는 자유로워진 자신의 왼손을 감싸며 신음소리를 냈다.
“하아...하아...”
라인메탈 칼날과의 접촉이 사라져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니 아까 내 팔을 붙잡던 그녀의 힘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꽤나 고통스러웠던 걸까? 밤피르라든지 베어볼프처럼 조금 특별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인메탈에 찔린 모습을 보는 건 최초였다. 보통의 인간보다 강력한 육체적, 마법적 능력을 가진 대신, 마치 반대급부처럼 특정한 금속이나 마법에 강한 반응을 보이는 희귀병을 가진 체질. 그게 마법에 의한 작용인 건지 그저 생물 진화의 한 갈래에서 나타난 현상일 뿐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아직 완전한 해명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일단’ 그렇게 정의된 사람들.
똑같은 괴력이라도, 생동감이 넘치는 앤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앤의 손아귀 너머로는 열과 힘이 요동치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밤피르에게 붙잡혔던 느낌은 마치 금속 구속구에 팔을 묶인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내게 덤벼든다고 하면 나 역시 바닥에 목이 꺾인 채로 쓰러져 죽어있는 녀석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괜찮아?”
충동적으로 칼을 뽑은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긴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묻자, 그녀는 약간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곤 대답했다.
“당신, 내게서 페어의 냄새를 맡았나 보네.”
쥐어 짜내듯이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고맙다는 듯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그녀는 눈빛을 강하게 하며 뭐라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내게 묻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직무상 말할 수 없는 거라면 안 해도 돼.”
“뭐?”
“애초에 물어볼 거라면 칼날을 박아두고 위협해서 물어봤겠지? 다만 한 가지만 정말로 묻고 싶은 건...”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정말 궁금한 걸 하나 물었다.
“여기 도대체 어디야?”
‘벨’은 잠깐 할 말을 잃은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노바... 부두의 창고에요.”
“내가 있던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군. 그렇지?”
“이제 어쩔 거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딘가 기가 차는 것 같은 표정. 뭐 어쩌라고.
“당신은 당신 갈 길로, 나는 내 갈 길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정말로 그걸로 끝?”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게 됐어.”
포로로 잡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여기가 일단 남의 나라 영토라는 것에다가, 상대는... 그래, 밤피르다. 아까 고문당하기 전에 내 팔을 바위처럼 붙잡고 있던 걸 생각하면 나로서는 어렵겠지.
“적어도 나는 어느 나라처럼 남의 나라 사람을 중립국 영토에서 납치하진 않거든.”
“장담할 수 있나요? 그게 임무가 된다고 해도?”
“일단 그럴 생각인데.”
‘벨’이 입술을 앙다문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모양인데... 아까부터 계속하던 말이지만, 상대는 페어한 편인 것 같다. 갑자기 뒤돌아서서 나를 때려눕히거나 하지는 않겠지.
“이쪽도 일이었어요. 국가를 위한.”
“이해하고 있어...머리로는. 그렇다고 물고문한 걸 용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이제 갈 길을 가는 건가요? 당신도, 나도?”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권총을 겨눈 채로, 상대에게 앞장서라는 의미로 눈짓을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앗!! 너!!”
-쾅-!!
지나치게 경계해 거리를 띄운 게 실수였을까? 천천히 문 쪽으로 가던 ‘벨’을 뒤따르려 하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더니 육중한 철문을 빠르게 끌어당겨 닫아버리고 말았다!
“무슨 짓이야?!”
급하게 달려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녀석은 그 사이 힘이 돌아왔는지 문을 굳게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하게 됐어요.”
“너!!”
“하지만 동료를 다 잃고, 아무런 결과물도 없이 돌아간다면 나는 폐기처분당할 거예요.”
폐기처분이라고...?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처연해 보였기에 잠깐 망설였지만, 아까 말한 대로 머리로는 이해해도 이런 일-감금-을 다시 당해줄 이유는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까까지 내 얼굴을 적시던 물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던 탓이었다. 또 그런 꼴을 당할까 보냐.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이거야?!”
-철커덩-!
내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지, 잠금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료를 불러올 거예요. 그때까지 얌전히, 죽은 이들과 함께 있어주지 않겠어요?”
곤란한 처지가 됐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허세를 부려 보았다.
“그 전에 아까 그 녀석이 돌아와서 나를 꺼낼 텐데?”
느낌상 다시 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때, ‘벨’이 문에 달린 쇠창살 너머로 얼굴을 내밀더니, 웃으면서 내게 되물었다.
“아까 그 사람과 내 동료들 중 누가 먼저 돌아올지 내기할래요?”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너...!!”
총으로 이 문을 뚫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의 육중한 느낌으로 볼 때 권총으로는 무리였다.
“젠장!!”
“그럼, 당신을 두고 경주를 시작해 보죠.”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몸을 돌려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젠장, 젠장, 젠장!!”
-쾅-!!
나도 모르게 육중한 철문을 두들겼다. 기껏 찾아온 탈출 기회를 쓸데없는 동정심 때문에 날리다니!! 화가 나서 내 머리라도 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그만뒀다.
“하아.”
대신,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생각해보면 진짜 바보처럼 굴었다 싶다. 상대는 그런 일을 하려고 훈련받은 사람이고, 뜻밖에 실패할 뻔하고선 다시 기회를 잡았다. 이게 웬일이냐 싶었을 것 아닌가? 그걸 앞두고 나는...응?
“아아아아악!!”
-쾅-!!
“으앗?!”
등을 기대고 있던 문에서 갑자기 큰 진동이 나더니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지?! 그사이에 돌아왔나?
-철커덩-!! 우직!!
자물쇠, 아니면 잠금장치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내가 무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한 번에 들이쳐 올 속셈인가?!
-철커덕-!
문이 열리면 제일 어두울 곳 같은 곳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아까 쓰러진 녀석의 시신을 엄폐물 삼고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리고 권총을 치켜들어 문 쪽을 겨눴다. 혹시 ‘벨’이라는 그 밤피르가 먼저 들어올지도 몰랐기 때문에, 왼손에는 라인메탈로 만든 칼을 역수로 잡고, 권총을 쥔 오른손을 떠받쳤다. 이게 내게 가능한 최대한의 준비였다.
-끼이이이익-!
문이 열리고, 바깥의 희미한 빛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쏠까? 지금 쏘지 않으면 금방 발견 당하겠지? 쏘자...아?
-털퍼덕-!!
사람 그림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쏴서 쓰러뜨리려던 대상이 그렇게 되는 걸 본 나는 순간 당황해서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고 쓰러진 사람을 살피다가, 다음 순간 얼어붙었다.
-크르르르...
두 번째 그림자의 모습은... 일단은 인간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두워서 생긴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빛이 기괴한 녹색으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등은 약간 구부정했지만, 기본적인 뼈대가 커서 작아 보인다는 느낌은 없었고, 살짝 구부리고 있는 손가락 끝부분은 기묘하게도 뾰족했다. 거기까지만 봐도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베, 베어볼프?!”
처음은 밤피르, 다음은 베어볼프인가? 오늘 밤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밤인지 모르겠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자니, 그 기괴한 안광이... 내 쪽을 향한다.
“으아...!!”
“꺄악?!”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왼손에 쥔 라인메탈 단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그리고 권총은 도대체 어디다 써야 하는 걸까 생각하던 순간.
“너무하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
놀라 눈을 뜨니, 아까 그 무서운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대신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자그마한 그림자가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흉흉하게 라인메탈 같은 걸 던지고. 구해주러 왔는데 말이죠.”
잔뜩 볼멘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어, 어라?!”
“저에요. 루크레티아.”
애매하게 웃으면서 살짝 손을 흔든다. 빛을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의는 탈의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바지에 상의를 끼워 뒀었는지, 펄럭하면서 펼쳐 들더니 주섬주섬 상의를 챙겨 입는다.
“루, 루크레티아 양?! 여긴 어떻게?!”
“한참 찾았답니다. 연줄을 위해 애써서 데려온 분이 실종된다면 저도 여러모로 곤란해서요.”
아직도 라인메탈 단검이 신경 쓰였는지, 루크레티아 양은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구하러 왔다. 깜짝 놀라서 총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으으....”
갑자기 바닥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가 하고 눈에 힘을 주며 보니, 아까 문을 닫고 가버렸던 ‘벨’이었다. 루크레티아 양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물기를 둘러보고선 혀를 살짝 차고는 한마디 했다.
“더군다나 누나분이 반쪽짜리 밤피르 따위에게 잡혀가서 물고문당하고 살해당한다면, 남동생분에게 평생 미안하게 되겠죠?”
“아아... 네.”
반쪽짜리 밤피르라. 몇 군데 부러진 듯 엉망으로 쓰러져 있는 그녀가. 그러면 반쪽짜리 밤피르를, 반쪽짜리라고 해도 내 팔을 죔쇠처럼 옥죄던 힘을 가진 그 밤피르를 저렇게 만든 루크레티아 양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는 말아 주세요.”
웃는 얼굴과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에서 뭔가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걸 멈췄다. 잠깐의 짧은 침묵이 있은다음, 루크레티아 양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상황을 모르겠군요. 상대는 하프 밤피르, 게다가 건장한 체구의 조력자도 있고. 실례지만, 당신이 이 모두를 쓰러뜨렸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건...”
아까 그 녀석에 대해서 알아차린 건가? 하지만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까 그 녀석은 아인과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루크레티아 양에게 그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납득할까. 내가 이 녀석들을 쓰러뜨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내분? 지금 이 자리에 쓰러져 있는 이 하프 밤피르만 입을 다물어 준다면 가능한 핑곗거리일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당장 중요한 건 역시.”
-퍽-!
“으윽!!”
“그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거겠죠?”
다행히 그녀는 내게 자세한 경위를 그 이상은 묻지 않고, 쓰러져 있는 ‘벨’을 한 대 걷어차더니, 일으켜 앉혔다.
“......”
루크레티아는 잔뜩 두려워하는 얼굴의 ‘벨’을 뒤에서 붙잡고선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정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재 외무성에서 아틀리아에 파견된 인원과 함께 활동하는 군인은 아인 소위 한 명뿐이죠. 해석하기에 따라선 외교 사절을 보좌하는 무관이라고 칠 수도 있겠군요. 급은 낮지만. 무관도 엄연한 사절이죠.”
그렇게 허술하게 되는지. 주재국에서의 인정을 받아야 외교 사절이 되는 거 아니던가? 아니다, 대사만 그랬나? 게다가 지금 아틀리아 자유국 영내에 들어와 있는 군인 중에는 장군들도 있는데, 일개 소위를 무관으로 친다는 건... 아니, 물론 그 사람들은 군사 작전상의 이유로 들어와 있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데.”
루크레티아 양은 내 의문과 상관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절의 일원인 무관을 납치, 감금하고 무려 물고문. 그 뒷감당이 될법한 일인지 생각해 보면 아마도 살해 후 은닉할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드럼통에 콘크리트로 굳혀 앞바다에 밀어 넣는다든지, 땅에 묻어 둔다든지?”
쓰러져 있는 벨은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정식으로 문제 삼으면, 어디인지 모를 당신의 나라는 당신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다시 거둬줄까요?”
“......”
설마, 회유하려는 건가? 하지만 ‘벨’은... 아니, 이제 이것도 지겹다. 정체불명의 밤피르라고 하자.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잠깐 대답을 기다리는 듯하던 루크레티아 양은, 얼마 안 있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궁금한 건 많지만, 여긴 아틀리아 자유국의 땅이니까. 정해진 절차를 지키려고 합니다.”

지하에서 조금씩 나갈수록 바다 냄새가 나더니, 아니나 다를까, 지하에서 올라와 낡은 건물, 아마도 창고의 문을 열고 나오니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어스름 속에 검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여긴 부둣가였구나. 아까 내가 갇혀 있던 곳에선 어째서 바다 냄새가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지. 일단 살아서 나온 게 중요하니까.
“무사하셨군요.”
가스등 불빛을 등지고, 호빗 여러 명이 권총이나 곤봉을 가지고 서 있었다. 복장을 보니 경찰. 그리고 그 가운데 줄리오 중위가 언제나처럼 희박한 표정을 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경찰이 아닌데... 직접 나서준 건가? 내가 납치됐다고?
“빨리 찾으셨네요.”
루크레티아 양이 웃으며 답하자, 줄리오 중위는 뒤쪽에 세워둔 자신의 말을 가리켰다.
“저 녀석 덕분이었습니다.”
-히히힝!
말이 타이밍 좋게 울음소리까지 내고 그러니 뭔가 굉장히 멋져 보인다...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주, 줄리오 중위님? 직접 나서신...”
국경경비대 소속이지 경찰이 아닐 건데, 어째서 줄리오 중위가?
“제 집에 찾아온 손님이자 전우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에...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죄송합니다.”
줄리오 중위는 당황하는 내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사람은?”
생긴 모습이야 어떻든,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지위도 높은 사람의 목례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 걸까 싶어 허둥지둥하고 있는 사이, 줄리오 중위의 시선이 ‘벨 씨’에게 향했다.
“납치단의 일원입니다.”
루크레티아 양은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납치단이라 하심은...”
“저 아래에는 시체뿐입니다. 이 자는 밤피르라 포박을 엄중히 했습니다. 호송할 때 주의하시길.”
줄리오 중위는 흠칫하는 기색이더니, 경찰들에게 자기네 말로 뭐라고 말했다. 경찰들 역시 얼굴색이 달라지며, ‘벨 씨’의 옆에 네 명이 들러붙더니 수갑을 채우고, 눈가리개에 재갈까지 한 다음 차로 데려갔다. 경찰이 어떻게 눈가리개나 재갈을 준비한 걸까?
곧 현장을 지휘하는 자로 보이는 경찰 하나가 줄리오 중위에게 조용하게 뭐라고 말하자, 줄리오 중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에게 권했다.
“일단 두 분은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시죠. 추가적인 조사는 경찰에서 사람을 보내서 하게 될 겁니다.”
“잠깐. 조사는 참관 가능할까요?”
줄리오 중위가 경찰에게 뭐라고 묻자, 경찰은 고개를 저었다. 중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루크레티아 양의 물음에 답했다.
“자치경찰 쪽에선 곤란하다는군요. 물론 피해자가 피해자이니만큼 경찰에서 물을 건 있겠지만.”
그러자 루크레티아 양이 이번에는 경찰 쪽에 아틀리아 어로 뭐라고 물었다. 경찰들은 고개를 젓거나 하진 않았지만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하며, 조금 급한 몸놀림으로 ‘벨’을 이끌고 경찰차로 돌아갔다. 도망가는 건가.
“정말.”
루크레티아 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폼이, 어째 조사를 참관하는 게 무산되어 아깝게 되었다는 것 같은데... 하지만 좀 쉬고 싶었던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눕고 싶었다. 루크레티아 양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그리고, ‘벨’의 정체에 대한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나를 구한... 누구였지? 아무튼 그 누군가가 아인을 알고 있다는 것. 그거야말로 내게 있어선 더 중요한 일이었다.

경찰차를 얻어 타고 루크레티아 양과 제노바 시내를 가로질러 저택으로 돌아갔다. 물론 줄리오 중위는 말을 타고 있었고. 어스름 속에서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이따금 이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저택까지 돌아가는 길을 대체로 평온했다. 루크레티아 양은 생각에 잠긴 채, 이따금 내게 시선을 보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악몽과도 같은 새벽의 후유증으로 인해 그렇게 편하지도 않은 경찰차 뒷좌석에 젖은 몸을 파묻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인 소위님!!”
“무사하셨군요!! 아아...!!”
줄리오 중위와 함께 저택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엘레노아와 마가레타 씨가 나를 반겼다. 나중에 엘리자베트가 말해줘서 알게 된 거였지만, 마가레타 씨는 줄리오 중위와 루크레티아 양이 집을 나설 때부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자기 집에 든 손님이 납치당해 험한 일을 겪었다는 걸 알고 나서는 그야말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레노아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는지 많이 피곤한 기색이었고.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호들갑을 떠는 마가레타 씨를 간신히 설득해, 남에게 몸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선 혼자 틀어박혀 목욕까지 어찌 마치고 나니 오전 8시가 조금 넘었고,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누군가 쳐다본다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떴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해가 지는지 약간 어두컴컴한 침실 머리맡에서 루크레티아 양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잠든 얼굴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지 말아주세요.”
조금 부끄러워져서 그렇게 볼멘소리를 하며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으음. 설마 잠꼬대 같은 걸 듣거나 하진 않았겠지. 아니면 자는 사람 바지를 벗겨 본다거나... 그럴 리가 없나. 이불 너머에서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든 사이에 경찰이 왔었어요. 일단 돌려보냈지만.”
매우 감사합니다. 속으로만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이불을 걷고 자리에 앉았다. 잠깐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자다가 일어나니 그런 상황이었고.”
“밤피르, 아, 물론 하프지만, 밤피르가 혼자도 아니고 도움을 받기까지 한다면, 별다른 대비 없는 사람 하나 붙잡는 건 쉬운 일이죠. 그게 설령 군인이라고 해도. 그러니 자책할 필요는 없답니다.”
“네, 그거야 뭐.”
확실히 밤피르나 뭐 그런 사람들이 타고난 능력은 감당하기 어렵지. 하지만, 루크레티아 양은 그 와중에도 나를 위로해주는 건가. 딱히 그런 이유로 자책하지는 않았는데. 그것보다는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당신은 어떻게 절 그렇게 빨리 찾은 거죠?”
루크레티아 양이 입을 다물었다. 그야 물론 한참 물고문을 당한 다음의 일이고, 흐릿한 기억 속에서 날 도우러 왔던 그 누군가의 다음에 왔지만. 그 정도면 납치당한 사람을 찾는 데 걸린 시간치고는 짧다. 그래, 마치.
“알고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납치당한 것을.”
“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루크레티아 양은 말없이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갇혔던 곳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서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군요.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일은 더 쉬웠을 거고.”
그래, 일리야 중령의 우려는 헛된 것이었다. 아무려면 연합왕국 첩보원들이 돌아다니는 곳에 보낸 사람이 마냥 포근한 인상을 가졌을 뿐인 사람이었을까.
“맞아요.”
“베어볼프?”
고개를 젓는 그녀.
“비슷하지만 달라요. 전 베어티게르죠.”
“그리고 그 하프 밤피르, 벨은 저녁 식사에 참석했던 그 연합왕국 상단 사람이로군요. 맞죠?”
“자기 이름을 벨이라고 하던가요? 그렇죠.”
“당신은 그녀가 하프 밤피르라는 걸 알고 있었고요.”
“맞아요.”
루크레티아 양은 순순히, 그리고 담담하게 내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라인메탈에 반응성을 가진 유전형질, 그걸 가진 분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나요?”
‘라인메탈에 반응성을 가진 유전형질’이란, 마법이라면 골치를 앓는 과학자들이 밤피르, 베어볼프 같은 사람들을 정의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들의 하나였다. 밤피르니 베어 ‘볼프’, ‘티게르’ 하는 무시무시한 단어들과 달리 차별적인 느낌이 가장 적기에 사용하길 권장하는 말이기도 했고. 약자로 줄이거나 하면 그 자체가 차별적 단어로 정착될 수 있다고 하여 다소 길어도 그대로 쓰라는 권고는 덤이었다. 쉽게 될 일은 아니었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 다르죠.”
“그러면 그런 유전형질을 가진 분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물고문을 하거나, 혹은 그런 짓을 당하는 걸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내버려 둘 수도 있나요?”
조용하지만 막힘없이 대답하던 루크레티아 양이 처음으로 뜸을 들였다. 당황하거나 한 기색은 아니었다. 다만 내 말에 돋친 가시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모양이었다.
“당신을 잡혀가게 뒀다고 생각하나요?”
“대답해주세요.”
그녀는 살짝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동포들의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모두가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할 수 있었던 모양이네요.”
사실 부정하더라도 뭐라고 더 추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었지만, 그녀는 얄미울 정도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루크레티아 양은 그 냉정한 대답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예의 그 포근한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와 같은 형질을 가진 분들의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전 아마 이런 몸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당신의 가족이 이런 상황이었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질려버리겠군요.”
얄미워. 가족이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참고 지켜보겠다? 몸서리가 쳐지는군. 이런 세상이 루크레티아 양이 ‘닻을 내린 곳’인가 싶어서. 우리 소대원들이라면 그러지 않을 건데. 아타만 군 막사에서 잡혀가는 나를 구해준 앤처럼... 최선을 다해 구해줬을 건데.
“푸념 좀 해도 돼요?”
“얼마든지.”
“내가 필요하다고 찾아온 사람을 수행하라고 명받았는데,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호랑이라서 내 경호는 딱히 필요하지 않고, 흡혈귀에게 잡혀가는 것도 그냥 보고만 있고.”
“죄송해요.”
즉답. 울컥해서 덧붙였다.
“저 물고문도 당했거든요.”
“...죄송합니다.”
조금 망설이면서 대답한다... 뭐, 이 정도면 됐나.
“저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요.”
어른답지 못하다는 건 알면서도 그래도 한 마디 덧붙인 다음, 이불을 끌어당기며 그녀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저 사과 이상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시간의 낭비다. 그녀는 죄송해도 다음에 또 그렇게 할 테니까.
“만약, 다음이 있다면...”
루크레티아 양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 그렇게 운을 떼었지만,
“아니, 아니에요. 오늘 밤은 편히 쉬세요.”
그렇게 어정쩡하게 봉합해버렸다. 그러고 나선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다음 날부터, 솔직히 끔찍한 경험을 한 직후라 상태가 영 좋지 않았고 한 달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곳에 처박혀 쉬고 싶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주변 상황은 내가 내게 벌어졌던 일들을 홀로 곱씹고 있도록 두지 않았다.
“제노바 지역 소방 위원회장님이십니다.”
“제노바 서부 부인회장님이십니다.”
“제노바 지역 퇴직 경찰공무원 협회장님이십니다.”
“제노바 지역...”
조금 정신을 제대로 차리자마자, 제네바의 지역 유지들이 다른 나라의 장교가 자신들의 도시에서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다면서 위문을 위해 방문을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리오 중위도 겉모습으로는 소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나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 위로 서리가 내리거나, 뭐 그런 식으로 나이가 들었다는 티가 나는 사람들이었다. 시장, 시의원, 현직 경찰서장, 전직 소방서장, 제네바 지역 세관장, 지역 도서관장, 승마 클럽 회장 등등. 듣기만 해도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목소리가 있겠구나 싶은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순서는 대개 이러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자신들의 도시에서 끔찍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한 유감이라고, 쾌차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 나는 병문안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한다. 그 과정에 지역 신문기자가 이따금 사진을 찍는 경우도 당연히 있었다. 그러고 나면 그 사람들은 집의 안주인인 마가레타 씨의 안내를 받아 다른 방에서 휴식 중이던 루크레티아 양과 만나 면담을 하고는 떠났다. 가끔 줄리오 중위도 그 자리에 동석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건지 원.

“제 병문안은 그냥 명분이군요.”
“부정하진 않겠어요.”
그렇게 보낸 시간이 무려 이틀, 이틀이었다! 심지어 2일째 오전 즈음에는 더는 몸에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충격받은 환자를 연기하며 자리에 반쯤 누워있어야만 했다. 미테란트에서라면 평생 겪을 일이 없을 이틀짜리, 수십 명의 지역 저명인사들의 병문안을 받고 나니, 진절머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생하셨어요. 아인 소위님 덕에 제1 해안파 인사들과 연결될 수 있었네요. 이번 여정에 있어서 가장 큰 수확이에요.”
아무래도 미안했는지 루크레티아 양은 이틀째 저녁에는 순전히 지쳐서 자리에 뻗은 내 곁에서 엘레노아와 함께 이런저런 수발을 들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지쳐 보인다며 두 사람은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소위님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네요. 그런 험한 일도 당하시고.”
루크레티아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엘레노아가 귓가에다 대고 그렇게 말했다.
“대충 알 것 같아요. 루크레티아 씨가 소위님을 도구로 써먹고 있다는 거.”
“엘레노아라도 알아주면 됐지. 고마워.”
“전 아틀리아어를 몰라서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신문에도 우리 이야기가 잔뜩 났어요. 미테란트 공화국, 군인, 장교, 폭력 뭐 이런 단어들이 수놓아져 있고. 혹시 아인 소위님 신상에 문제가 있는 내용이면 어떡해요?”
“아틀리아 자유국은 그런 문제를 크게 키우지 않는 게 전통적인 방침이었으니까. 국내용이겠지. 내 신상에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결국에는 공화국을 위한 일이니. 내가 감수해야지. 뭐, 놈들이 바지를 벗긴 것도 아니고 괜찮아.”
그건 진짜 다행한 일이었다. 급하게 뭔가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듣고 싶었는지 몸수색도 무기나 소지품 수색 이상은 하지 않고 곧바로 물고문으로 들어갔으니, 놈들에게 내 정체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요.”
엘레노아는 뭔가 불만인 듯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쪽에서 괜찮다는데 딱히 더 할 말은 없는지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인이 애국 광인 내지는 인간미 없는 사람으로 찍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래도 물고문의 대가는 언젠가 받아낼 거야. 이자까지 쳐서.”
“어떻게요?”
“생각하려고. 지금부터.”

뭐 사실은 안 할 거지만. 가뜩이나 수발드는 사람이 계속 옆에 붙어 있어서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더군다나 나를 도와줬던 누군가가 아인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 건지 알고 있다고 한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루크레티아 양이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통해 아인에게 빚을 졌다면 이번 일도 꼭 손해만은 아닐 것이기도 하고. 좋게좋게 생각하자. 그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제노바 경찰에서 나를 불렀다.

“자동차 이동은 삼가달라는군요.”
“설마 걸어오라는 건가요?”
군복은 괜한 주목을 끌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니, 루크레티아 양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관용차를 내주겠데요.”
“하지만, 거기 간다고 해서 뭐가 되려나요.”
잡혀간 그 ‘벨’이라는 여자는 자기 혐의를 부인하거나 부인이 어려우면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을까?
“제노바 경찰이라고 모르고 부르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군인이건 경찰이건 같잖아요?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에요. 일을 키우든 덮든, 마무리를 짓기 위해선 필요한 절차란 건 있는 거고.”
전에 그 학살 현장에 헌병대 검시관이 왔던 것처럼 말인가.
“결국 제노바 경찰의 체면이나 법적 절차를 위해 가는 건가요?”
철저히 이용만 당하는 여행이구나 싶어서 싫은 소리를 하니, 루크레티아 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게 크지만, 현장에 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있으니까요.”
“납치범 녀석의 헛소리나 듣게 될 텐데 무슨 정보가 있다는 거죠?”
내 물음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반문했다.
“아인 소위. 수색부대는 왜 존재하죠? 시대가 변해 비행기가 생기고 정밀한 사진도 찍을 수 있고 무전기도 있는데 항공정찰만 하면 되는 일을.”
뭐...가짜 신분이라곤 해도 어쨌든 소대장 일을 몇 달째 하는 내게 그걸 묻는 건가?
“항공정찰로 찍은 사진은 제때 전달되지 못해요.”
“그렇게 치면 체공 시간이 긴 비행기에 무전기를 달고 지상군 머리 위를 돌아다니게 하면 충분하겠죠? 제공권만 확보하면 안전한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걸.”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수색부대가 미리 밟아보지 않으면 주력부대가 갈 수 있는 길인지 없는 길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요. 제가 굳이 당신을 데리고 제노바 경찰에 출두하려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나름 와닿기는 하는데, 군인 상대라고 삭막한 비유를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시간 낭비일 가능성이 9할일 것 같네요.”

그리고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덧글

  • 서지원 2019/08/26 19:24 # 삭제 답글

    우와 혹시나 해서 들어와 봤는데 다시 연재 하실 계획이신가요?

    혹시 19금편 포함 다른곳에서 연재하거나 소설 배포 하실 계획 있으시나요?
  • 애독자 2019/10/15 13:01 # 삭제 답글

    오랜만에 와서 읽고갑니다
  • Seattle 2019/10/16 12:05 # 삭제 답글

    오래간만에 방문해보니 올라와있네요... 반갑습니다. 칼은 어째 점점 더 호구가 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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